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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종이 성군(聖君) 대접을 받는 이유

기고- 세종이 성군(聖君) 대접을 받는 이유

  • 기자명 조병인 세종스토리텔러, 법무부 인권강사
  • 입력 2020.09.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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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인 세종스토리텔러, 법무부 인권강사△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 한국공안행정학회 회장 △저서: 세종식 경청, 세종의 苦(고): 대국의 민낯, 세종치세 도둑 대학살 등 △유튜브채널: 세종실록TV

성인(聖人)의 자격요건

서기 1450년(세종 32) 2월 17일 세종이 54세로 숨을 거뒀다. 4년 뒤 세종실록이 완성되었는데, 사관들이 작업을 마치면서,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해동의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라고 써놓았다.

해동은 중국에서 조선을 일컫던 명칭이고, 요순은 중국 역사상 정치를 가장 잘해서 중국인들이 ‘성군(聖君)’의 본보기로 꼽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전설 속의 인물이지만, 태평성태를 이룬 제왕으로 통한다.  

당시 사람들이 세종을 ‘해동의 요순’으로 불렀다는 것은 세종을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聖君)으로 여겼다는 뜻이고, 세종실록의 통치행적은 사관들이 기록을 날조하거나 과장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준다. 당대 최고 수준의 유학지식을 갖고 있었던 세종은 요순임금을 본받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34살 무렵 수학책인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홍문관 부제학(정3품) 정인지에게 산수를 배우는 이유를 말했다.

임금은 산수(算數)를 배울 필요가 없을 듯하나, 성인(聖人=요순임금을 말한 것임)도 산수를 배웠으니 나도 산수를 알고자 한다.[세종 12년(1430) 10월 23일]

그렇다면 세종이 그 언행을 닮고자 한 ‘성인(聖人)’의 자격요건은 어땠을까?    해답은 한자 한두 개의 의미를 따져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우선, 한자어 ‘聖人’에서 ‘聖(성)’자는 耳[귀]를 呈[드릴 정. 바치다. 뽐내다.]에 올려놓은 모양새다. 사람들의 말을 가리지 않고 들었다는 뜻이고, 불멸의 성인들인 공자, 석가, 예수는 모두 ‘들어주기’의 지존들이었다. 주역(周易)에서 ‘성인(聖人)의 4덕(四德)’으로 꼽은 ‘총명예지(聰明叡智)’ 중 맨 앞자리의 ‘聰(총)’은 ‘耳(귀)’에 ‘悤(바쁠 총)’이 합쳐진 구조다. 그러므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성군의 상징이 된 것은 “모두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주먹구구식 짐작이 아니라 믿을 만한 증거들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요순(堯舜)과 세종의 공통점

먼저 요임금의 행적에 대하여는 제감도설(帝鑑圖說) 상편에, “왕위에 있으면서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고 일을 맡겼다. 또, 문 앞에 북을 달고 나무를 세워, 자신이 잘못하면 누구나 북을 치고 안으로 들어와 간(諫)하거나 나무에 적게 하였다[간고방목(諫鼓謗木)].”고 적혀있다.

제감도설은 중국의 명(明)나라 말기에 장거정이라는 정치인이 쇠락해가는 나라의 중흥을 위해 10살 된 황제(13대 만력제)에게 일종의 제왕학 교과서로 지어서 바친 책이다. 순임금의 행적에 대하여는, 유교의 4대 경전에 속하는 중용 6장에, “묻기를 좋아하고[호문(好問)], 하찮은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호찰이언(好察邇言)], 악(惡)을 숨겨주고 선(善)을 드러냈으며, 극단적인 두 주장을 지혜롭게 절충하여 백성에게 제시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기록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세종이 생전에 성군 대접을 받은 것은 능숙한 경청 자세 덕분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알려진 것처럼 세종은 어릴 적부터 독서광이었다. 독서는 제2의 경청이다. 이미 세상에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직접 들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의 글을 통해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세자를 거쳐 임금이 된 뒤에는 다방면으로 언로를 열어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거나 직접 뽑아 길러 그들의 생각과 의중을 청취하였다. 신하들과 자주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벌이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광범위하게 모았다.

비록 시골에서 꼴을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들어 보고, 옳으면 채택하여 아래의 사정을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려고 애썼다. 말이 사리에 어긋나도 말한 사람을 꾸짖지 않았다. 세종 때 좌의정까지 지내고 종묘에 세종의 공신으로 배향된 허조가 71살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임금이 보내준 어의에게 남긴 ‘간행언청(諫行言聽)’ 유언은 세종이 경청의 고수(高手)였음을 짐작케 한다.

요순(堯舜)과 세종의 차이점

따라서 ‘신하와 백성들이 세종을 해동의 요순으로 불렀다.’는 실록기사는 신뢰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생각의 지평을 창작과 발명 업적으로까지 확장하면, ‘세종은 요순을 능가하였다.’고 하여도 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순도 세종도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경청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듣는 목적과 방식이 확연하게 달랐다. 요순은 간언을 겸허히 수용하고 하찮은 말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세종은 사람들의 생각과 발상을 모아서 위대한 창작과 별명을 이뤘다. 요순은 인재들을 가려서 권한과 책임을 나눠주고 신하들이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 듣는 ‘소극적 경청’을 하였으나, 세종은 신하들과 마주 앉아 질문과 토론을 통해 모두가 함께 여러 생각을 공유하는 ‘적극적 경청’을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나눠주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문자를 개량한 것일 터이다. 우매한 백성이 한자를 몰라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독단으로 은밀히 언문(훈민정음)을 창제해,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편하게 쓸 수 있게 한 일은 그 어떤 말로 칭송해도 부족하다.

비록 세종의 단명으로 새 문자가 곧바로 쓰이진 못했어도, 오늘날에 와서는 나라와 백성 사이의 소통을 촉진하고’, ‘백성의 일상적 삶을 편하게 해주고’, ‘백성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송사(訟事)의 투명성과 정확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화시대에 최고로 적합한 과학성이 널리 각광받고 있다.

1997년 10월 1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매년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수여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종과 하위지의 수어지교(水魚之交)

세종이 마흔두 살이던 1438년(세종 20) 4월에 과거급제자 명단이 발표되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부들이 ‘철없는 애송이의 망발로 직임을 더럽힐 수 없다.’며 집단으로 사표를 냈다. 장원에 오른 생원 하위지(27살)가 답안에서, 임금이 (유교나라의 임금으로서) 할머니 신덕왕후의 원찰인 흥천사 사리각(舍利閣)을 수리하게 한 것을 성토하고, 그런 사실을 알고서도 모른척한 대간들을 탄핵하라고 청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시험문제와 하위지의 답안을 가져오게 하더니, 위지의 기개를 칭찬하고 임금의 잘못을 알고서도 침묵을 지킨 대간들의 직무태만을 꾸짖었다.

“과거를 실시하여 대책을 묻는 것은 직언을 구하기 위함인데, 위지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강직하게 답안을 적었으니 매우 취할 만하다. 또, 위지는 단지 간관의 과실을 말했을 뿐인데, 경들은 무슨 이유로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것이냐. 또, 내가 비록 조종을 위하여 불사를 일으킨 것이라도 대간인 그대들이 나를 말리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 아니냐.”[세종 20년(1430) 4월 12일]

그러자 사헌부 대간들은 물러갔는데 사간원 간관들이 남아서, 영의정 황희가 과거시험 총책으로서 채점을 잘못하였다며, 엄한 추국을 명해달라고 청했다. 임금이 격노하여 꾸짖기를, "과거시험은 바른 말을 구하려고 시행하는 것이고, 위지의 답안도 그에 따라 작성된 것이니, 영의정을 문책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니, 간관들이 재차 같은 청을 반복했다.

임금이 꿈쩍도 하지 않자 대간들이 할 수 없이 물러갔는데, 이틀 뒤에 황희가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또 불같이 화를 내며, 황희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위로하는 말과 함께 사표를 돌려주고는, 형조로 하여금 사간원의 간관들을 추국하게 시켰다.

“영의정 황의는 잘못 한 것이 없다. 그리고 내가 위지를 혼내려고 하더라도, 언관들은 마땅히 ‘신출내기의 분별없는 실언’이라고 극력 진언하여 위지를 구해줘야 할 것이거늘, 그대들은 어찌하여 위지를 궁지로 몰아 후일의 직언을 막으려 하느냐. 또, 시험을 관장한 대신까지 죄를 씌워 국가에서 선비를 선발하는 취지를 모욕하였으니, 언관의 체통에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형조는 간관들을 추문(推問)하여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세종 20년(1430) 4월 14일]

하위지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에 임명되었다. 위지가 순진하고 정직한 천성으로 오직 공무만을 위해 수시로 시국의 폐단을 간하니, 세종이 극진히 아꼈다. 세종의 각별한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한 위지는, 그 아들인 문종과 손자인 단종 때도 강직한 성품을 지키며 과감한 간언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이 세종의 장손인 단종으로부터 보위를 빼앗자, 집현전에서 함께 세종의 총애를 누린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김질(정창손의 사위)의 고변으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다섯 동료와 함께 당당하게 목숨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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