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③

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③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9.14 08:11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애수의 남쪽 항구, 예향 넘치는 목포

이 봄 목포에 서성인다. 목포의 봄꽃이 여느 남쪽 항구보다 각별히 아름답지 않아도 애수가 넘치는 골목만으로도 따뜻하다. 본격적 유행가의 시발이라는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 현해탄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목포사람 김우진의 걸작이다. 트로트 음악 절정의 70년대를 구가한 핸섬보이 남진과 이미자에 필적하는 매혹의 조미미도 목포가 생장 무대이자 ‘떠나가는 연락선’의 노래배경이다. 극작가 차범석, 춤의 명인 이매방, 소설가 박화성이 유달산 정기를 빌어 태어났다. 서정시인 노향림이 가곡의 무대에 올린 <압해도> 또한 따뜻한 목포가 안고 있는 검푸른 섬을 향한 찬사다.

압해도 사람이 보지 못하는 압해도, 시인 노향림

지금 압해도로 가는 길이다. 한 곡의 노래 <압해도>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가곡 압해도는 대중가요의 골목길에서는 비켜나 있다. 하지만 목포를 이야기하면서 목포를 옹위하고 있는 압해도를 지나치는 것은 예(禮)가 아니어서 장르를 이탈한다. 목포사람들이 사랑한 신안의 섬 압해도는 시인 노향림이 널리 알린 섬이다.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서해 바다 그 푸른 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하이얀 뭉게구름 저 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 가면 친구여 바다 소나물(소나무) 사잇길로 가자/ 늘리(우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로 가자 <압해도>, 노향림 시, 최영섭 곡

어디 있는 섬인지도 모르면서 노래부터 먼저 배웠다는 사람도 많다는 <압해도>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유명한 최영섭 곡이다. 사람들은 3절의 ‘바다 소나물’과 ‘늘리’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뒤적여도 나오지 않는 시인의 단어에 궁금해 했다. KBS에서 악보를 제작하며 실수한 오탈자였다. 미상의 단어가 압해도의 신비를 더한다. 가요는 대개 그 노래의 가수로 대중에게 기억되지만 가곡은 작사, 작곡자로만 기억된다. 가곡은 원창자가 없기 때문이다.

압해도 해변

해남 산이면 태생인 노향림은 어릴 때 목포로 이사 왔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산정동 시절이었지만 ‘끼니는 굶어도 책은 산다’는 서울 중앙고보 출신의 아버지 곁에서 빅타레코드의 하얀 강아지 로고가 그녀의 유년 시절 첫머리에 각인된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해서는 여고 시절을 보내고 중앙대 영문학과를 나왔다. 시신을 실은 수레, 바다로 가는 수장(水葬), 콜타르 칠한 판자 울타리의 우울한 색감이 그녀의 감성을 물들였다. 문학평론가 김 현이 칭찬했다는 시 <꿈>의 배경은 어린 노향림이 복막염으로 누워 있던 6조 다다미방이다. 손혜원의 적산가옥과 비슷하게 나이 먹은 늙은 목포의 골목길이다. “압해도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 한다”며 그 섬을 사랑하고 ‘머리를 들 듯 들지 않는 섬’이라며 <압해도> 연작시 60여 편을 써 내려간다. 시인 홍신선의 아내가 되어 서로가 서로의 시를 넘겨다보는 가운데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평을 빌리자면 노향림은 ‘말이 곧 시가 되는 시인’이 되었다.

자전거를 접어 굳이 멀지도 않은 섬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은 압해대교가 자동차전용도로이기 때문이다. 슬금슬금 타고 다니기는 해도 자전거의 안전은 만들 때부터 고려하지 않은 다리다. 이 연장선에서 작년에 개통된 천사대교 7.2km 구간도 예외 없이 자전거 배제다. 일본의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가로지르는 여러 장대교와 심지어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자전거길을 설치해 수많은 관광객을 외국에서까지 불러들이는 데 비한다면 꽉 막힌 안목이다.

검색이 알려준 대로 노향림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압해읍에 내린다. 읍사무소 관광 담당 직원도 ‘노향림 시비’는 잘 모른단다. 물어물어 ‘신안군립도서관 앞뜰에 있다’ 해서 찾아가니 도서관 직원들도 잘 모른단다. 난감해하는 나를 보고 겸연쩍은지 나이든 직원이 어딘가 본 기억이 있다며 바닷가 어디를 검색해 찾아준다. 아마도 도서관을 신축하며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옮겨 간 것이리라. 해안으로 난 이십 리길은 그야말로 갯벌의 고요가 말라붙어 있다. 간척을 한 둑 위로 가는 길이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함이 오히려 시원하다. 노향림 시비는 아직도 단장을 하고 있는 ‘천사섬분재공원’ 앞바다와 붙은 주차장 끝머리에 서 있다. 외롭기는 해도 도서관 마당에 있는 것보다야 시 <압해도>에 걸맞는 위치다. 멀리 송공항과 막 개통한 ‘천사대교’가 보인다. 다시 시비를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어려운 말 하나 없는 시의 강물은 어느새 섬진강과 영산강을 지나 압해도에 이른다. 가보고 싶은 그 푸른 섬이 절로 눈앞에 어른거리게 만든다. 압해도 주민이 스스로 모금하여 1996년에 세운 시비이니 관청이 예산으로 거창하게 세운 것과는 격이 다르다. ‘시비 하나 만나러 이 먼길을 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어버리리라.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이내 송공항이다. 띄엄띄엄 목포로 나가는 버스에 다시 오른다. 접이식 자전거로 하는 여행의 묘미인 점핑이다. 

<비 내리는 호남선>, 그 종점이자 시발점 목포역

목포역에서 내려 서울행 기차를 기다린다. 원래 목포역은 갯물이 드나드는 바다 가운데에 둑을 쌓고 호남선 철로를 놓은 끄트머리에 있다. 목포역이 있는 색 바랜 흑백사진 속에 앞도 뒤도 갯벌인 목포는 비좁게 보인다. 목포의 역사(歷史)는 바다를 메워나간 역사(役事)와 동행한다. 하루 전날 길을 잘못 들어 목포역 동쪽 청호시장을 지나오며 “어물전이 왜 이리 많은가”싶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목포의 구도심 골목길이 제멋대로인데 비하면 삼학도까지 이어지는 연동, 동명동, 삼학동 일대가 바둑판처럼 구획이 잘되어 있는 것도 매립지에 도시계획을 한 결과이다. 비라도 내려 준다면 <비 내리는 호남선>이 제격이련만 마른 봄 하늘 저편에서 그저 어둑한 기운만 다가왔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비내리는 호남선>, 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 1956, 오아시스 레코드

이 노래는 뜻하지 않게 정치에 휘말린 노래가 되었다.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호남지방으로 유세차 내려가던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가 이리역(익산)을 지날 때 심장마비를 일으켜 갑자기 서거하게 된다. 바로 사흘 전 서울 한강 인도교 부근 백사장에서 30만 인파가 몰려들어 환호하던 후보가 아니던가. ‘의문의 죽음’이란 설까지 나도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하지만 노래는 해공의 추모곡이 되어 날개를 달았다. 신익희를 추모해서 ‘미망인이 가사를 붙인 게 아닌가’하는 경찰의 추궁도 이미 석 달 전에 출반된 사실이 알려지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손인호의 구성진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호남인들에게는 애환을 노래하는 <제2의 목포의 눈물>이 되었다. 어느 작가는 서울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면 호남선을 타고 영산포에서 내려 고향 장흥으로 가는 길에 곰탕 한 그릇에 막걸리 잔을 들고 흥얼거렸던 노래가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다. 목포 출신 소설가 천승세는 “반드시 ‘비나리는’으로 불러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는 노래다. 노래 한 곡의 힘을 다시 실감한다. 두 시간이면 닿을 서울행 KTX는 어둠을 뚫고 나리는 비조차 튕겨 나가고 말 고속 질주를 시작한다.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