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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공주마마…북벌의 웅지를 품었던 효종대왕의 막내딸 숙경공주효종대왕·인선왕후 녕능과 가까운 대신면 상구리에 부마 원몽린과 영면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여주는 한반도의 젖줄이라고도 불리는 남한강을 끼고 역사와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과 북벌의 웅지를 품었던 효종대왕을 모시고 있으며, 국난의 시대 구국의 민족적 긍지로 이름 높은 명성황후를 비롯한 8명의 국모를 배출한 ‘왕과 비’의 고장이다.

세종대왕을 중심으로 한글과 연계되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글 문화도시를 꿈꾸는 여주.

여주시에서 영면하고 있는 조선시대 걸출한 두 분의 군왕이 바로 세종과 효종이다.

두 대왕의 업적은 특히 우리 여주사람들의 자긍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숙경공주(淑敬公主)는 북벌의 웅지를 품은 효종대왕의 제6공주로 막내딸이다.

숙경공주는 효종 10년(1659)에 평안도관찰사 원만리(元萬里)의 아들이며 원두표(元斗杓)의 손자 몽린(夢麟)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인선왕후가 1659년 이후 셋째 딸인 숙명공주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편지를 보면 막내딸 숙경공주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네가 쓴) 편지 보고, 아무 탈 없이 있으니 기뻐하며, (너를) 보는 듯 반가워한다.
사연도 보고 못내 웃었다. 그만큼 하여 두면 아무리 쓰려고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 사람이 있겠느냐.
옷감도 지금까지 못 얻었으니 그것이 완성되기 어려울까 싶다. 너무 조르지나 마라.
숙경(淑敬)이는 내일 나가게 되었다. 그것(=숙경공주)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가지 마음을 진정치 못할까 싶다.
언제 너희나 들어올까,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있다.>

인선왕후의 이 한글편지는 막내딸 숙경공주가 혼인한 후, 궁에 들어왔다가 나가게 되었을 때 느끼는 어머니의 서운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숙경공주는 12세인 효종 10년에 원몽린과 결혼하였고 현종 12년 24세로 졸했다. 숙경공주와 원몽린 사이에 자식은 외동딸밖에 없어 원명구를 양자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671년(현종 12) 숙경공주가 마마로 위독해지자, 그 시아버지인 원만리를 불러 병구완을 하게 하였으나 곧 죽었다. 

오빠인 현종이 백관과 함께 숭문당에서 곡을 하였다. 당시 현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를 만류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현종이 듣지 않았다. 남편 원몽린도 그로부터 3년 뒤 죽었다.

숙경공주와 원몽린 묘는 대신면 상구리 산11-8번지(안말)에 있으며, 여주에서 양평으로 가는 37번 국도에서 상구리로 이어지는 블루헤런골프장 입구 못미처 오른쪽으로 이정표가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아담한 한옥을 중심으로 몇 채의 집이 있는데, 이 집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각받침의 지붕돌을 얹은 양식의 원몽린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 오른쪽 경사지에 원몽린과 숙경공주 합장묘가 있고 바로 뒤쪽에 아버지 원만리의 묘소가 있다. 묘역은 보전이 잘되어있으며 석물도 잘 갖추어져있다.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은 단아하고 망주석은 세호와 연주, 당초문이 조각되어있다. 

뒤에 조성되어 있는 묘역은 원몽린의 아버지인 원만리의 묘역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여주시사와 국가문화유산포털을 인용했습니다. 

이장호 기자  yeojupe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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