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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②

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9.0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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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남쪽 항구, 예향 넘치는 목포

이 봄 목포에 서성인다. 목포의 봄꽃이 여느 남쪽 항구보다 각별히 아름답지 않아도 애수가 넘치는 골목만으로도 따뜻하다. 본격적 유행가의 시발이라는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 현해탄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목포사람 김우진의 걸작이다. 트로트 음악 절정의 70년대를 구가한 핸섬보이 남진과 이미자에 필적하는 매혹의 조미미도 목포가 생장 무대이자 ‘떠나가는 연락선’의 노래배경이다. 극작가 차범석, 춤의 명인 이매방, 소설가 박화성이 유달산 정기를 빌어 태어났다. 서정시인 노향림이 가곡의 무대에 올린 <압해도> 또한 따뜻한 목포가 안고 있는 검푸른 섬을 향한 찬사다.

한국의 엘비스프레스리, 남진의 목포2

고향을 떠나 상경한 그 시대의 청년들 또한 남진의 <서러운 타향>(김중순 작사, 김영광 작곡)을 따라 불러보며 “어머니, 왜 날 낳으셨냐’고 불효한 투정도 하면서도 돈 벌어 고향 땅 다시 밟기에는 ‘위로와 타협’이 필요했다. 남진은 <돈이 최고냐>, <맨주먹 인생>(남정일 작사·곡)에서 이들을 어루만지며 성공을 못 할 바엔 <타향에다 뼈를 묻으리>라고 공감의 다짐을 한다.

사나이 한번 먹은 굳은 맹세를/ 내 어이 잊을쏘냐 잊을 것이냐/ 금의환향 못 하고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어머님 이별할 때 하시던 말씀/ 내 어이 모를쏘냐 모를 것이냐/ 한 번 빼 든 이 칼을 다시 거두면/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꿈속에 어머님을 뵈올 적마다/ 검은 머리 백발되어 기다리시네/ 효도 못 한 자식이라 나그네라면/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타향에다 뼈를 묻으리>, 윤일로 작사·곡, 남진 노래, 1966, 오아시스레코드

왈츠(waltz)곡의 흐름 속에 대중가요답게 직접적이고 비장하게 와 닿는 노랫말이다. 데뷔 55년을 맞은 남진의 가요이력서는 화려한 수직 상승과 서글픈 좌절 행로를 거쳐 부활하는 청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제 가요계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되었다. 그의 노래가 지나온 정거장도 꽤나 여럿이고, 차창에 서린 사연 또한 절절하다. <님과 함께>나 <둥지> 같은 노래 이야기는 우리 가요사를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게 될 것이다.

오늘 그가 태어난 자리에서 본 남진의 흔적은 한 전설이 어쩐지 괄호 밖에 서 있다는 느낌이다. 그가 마지막 기항지로 고흥을 정하고 폐교부지를 사서 ‘남진기념관’을 짓는다는 소식은 어쩐지 쓸쓸하다. <내 사랑 고흥>을 신곡으로 내놓고 팔영산과 나로도를 노래하는 그는 성공해서도 그의 옛 노래처럼 ‘타향에서 뼈를 묻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고향 <목포의 눈물>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속내에는 남진의 깊은 뜻을 목포가 더 넉넉하게 안아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전설도 이야기 속에서 끄집어내 역사로 만드는 판에 이난영과 더불어 남진, 조미미는 물론 그 숱한 목포의 노래를 영원히 불러 앉히는 ‘목포의 노래기념관’이야말로 적산가옥 앞을 서성이는 목포 밖 사람들에게 추억의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삼학도 언저리나 갓바위해상공원으로 가는 길목 ‘목포문학관’ 옆에 다정하게 들어선다면 문학의 지평을 넓힌 또 하나 목포의 자랑이 되지 않겠는가. 노래 가사 또한 서민 대중이 사랑하는 ‘노래 시’이니까.

너무 일찍 사라진 트로트의 또 한 별, 조미미

또 한 사람 목포가 낳은 가수는 조미미(1947~2012)다. 전남 영광 태생이지만 목포 대성동에서 자라 목포여고를 나왔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유별나게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고 말한다. <떠나온 목포항>으로 데뷔하여 노랫말처럼 목포를 떠나 <바다가 육지라면>,<서산갯마을>,<서귀포를 아시나요>,<선생님>,<먼데서 오신 손님>,<단골손님>,등 55개 독집과 100여 개 디스크에 1,000여 곡을 발표한 대 가수다. 조미미 노래의 정서는 그 시대를 함께 풍미한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과 <동백 아가씨>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들은 목포항을 이별하고서/ 떠나온 지 어연간 몇몇 해인가/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 우뚝 솟은 유달산/ 어느 때나 다시 보리 그리운 목포항구 
눈물로 부모 형제 이별하고서/ 어린 가슴 졸이며 떠나온 목포항/ 기적소리 목 메인 차창에 쓸쓸하게 기대여/ 성공하고 돌아오마 맹서한 목포항구 <떠나온 목포항>, 감우동 작사/김부해 작곡/조미미 노래, 1965, 오아시스레코드

초기 조미미의 노래도 ‘바다 이미지’라는 연장선을 떠나지 못한다. 동·서·남해가 두루 망라된노래다. 월남이라는 이름이 외국의 전부였고, 추억의 남십자성으로 기억하는 세대에게 조미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노래의 인기만큼이나 스캔들은 버스 차부(정류장)의 가판대에서 팔려 나갔다. ‘선데이 서울’과 ‘주간 경향’, ‘야담과 실화’와 ‘명랑’ 잡지는 빗물에 젖은 벽지 위에 연모하는 스타의 화보를 붙여놓고 그녀를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연예가 중계’였다. 일부러 찾아가 내 머리를 오래도록 맡겨온 안양 장미이발관 강승원(64세)씨는 조미미가 부른 <선생님>의 주인공이 ‘월남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남진’이었다는 그 시절 풍문을 회상하며 활짝 웃는다.

같은 시대를 누빈 남녀 가수 4인은 남진과 이미자, 나훈아와 조미미로 짝지어 대비된다. 남진과 이미자의 노래는 날씬하고 애절하다. 나훈아와 조미미의 노래는 두툼하고 구성지다. 나훈아와 조미미가 같은 오아시스 레코드 전속 가수라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비교한 어느 가요애호가의 절묘한 대비표가 인상적이다. 

2012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미미의 가요 인생은 너무 짧다. 조미미 또한 나의 가요여정 곳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네온의 거리에서, 쓸쓸한 갯마을에서 다시 추억할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항구, 목포

목포역 보해상가 앞에서 자전거를 접어 압해도 송공항으로 가는 130번 시내버스를 탄다. 북교초등학교를 지나 북항으로 가는 길은 목포 구도심을 두루 거치면서 유달산 봄꽃을 멀리서 완상할 수 있게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극작가인 차범석의 고향이다. 가난을 소재로 한 일관된 현실 고발과 사상성이 녹아 있는 리얼리즘 문학의 여류 소설가 박화성과 한국문학평론의 독보적 존재인 김 현이 북교초등학교를 나왔다. 그 외에도 휴머니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천승세, 불의에 저항하는 <오적>의 김지하 시인이 산정초등학교 출신이고, 몽환적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시단의 균형주의자 최하림, 한국수필 문학의 비조로서 6.25 때 납북된 <백설부>의 작가 김진섭 그리고 권일송 시인까지 기라성같은 문인들을 목포가 배출했다. 한국 전통춤의 거목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승무, 살풀이춤 2가지 명예를 보유한 유일한 춤꾼인 이매방이 목포 대성동 출신이다.

지난해 가을 바다를 가로지르는 유달산 케이블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유달산에서 고하도에 이르는 3,234m이다. 중간 승강장이 유달산 정상에 만들어지고 왕복 40분이나 걸린다. 유달산 아래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는 바다로 건너기 직전에 오래된 붉은 벽돌 공장, 흑백사진처럼 누렇게 바래가는 조선내화의 옛 공장 위를 지난다. 아직 어떤 용도로 재탄생할지 정해진 것은  없다. 몇 년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연극인 유인촌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홀스또메르>를 이틀에 걸쳐 상연할 때 400여 석의 임시 자리를 꽉 채운 붉은 창고에서 받은 목포시민의 감동이 되살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해상 156m 높이를 지나는 시원한 풍경은 목포의 새로운 명물이 되어 예향 목포를 한눈에 다 담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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