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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1 (목포1)·③눈물의 종점, 목포는 항구다

누가 뭐래도 목포는 항구다.  
부산이, 여수가 항구가 아닐 리 없지만 항구와 아귀가 딱 맞는 한 문장을 만들기엔 목포만 못하다. 노래 한 곡의 강렬한 힘, 그 정의(定意) 때문이다. 남진이 “눈물 얘긴 그만하자”고 하지만, 눈물 없이 어떻게 ‘오래된 목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목포의 노래들이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이란 삼각대 위의 견고한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락선을 타고 사랑과 함께 사라져 남이 된 님이 거나 돈 벌러 화물선을 타고 떠나간 님이거나, 항구의 님은 쓰라린 이별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눈물이 말라붙은 비릿한 항구를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저인망이 비켜 갔기에 오래된 목포는 근대사의 거리에 남아 있는 적산(敵産)을 지킬 수 있었다.

41년 만에 돌아온  고향 목포, 삼학도 ‘이난영 공원’

삼학도로 가는 길은 평탄하다. 매립지이기 때문이다. 삼학도를 에워싸고 있는 수로를 강변이라고들 말하지만 매립하고 남은 바다의 마지막 흔적이다.

가장 큰 대 삼학도 산허리에는 ‘이난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목포의 눈물 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2006년 경기도 파주 용미리에서 옮겨온 이난영이 묻혀 있다. 41년만의 귀향이자 수목장이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목포의 눈물이 다 말라버릴 정도로 쉼 없이 노래가 흐른다.  노래 한 곡의 애상을 잔잔히 되새겨볼 수 있는 여백 자체가 없는 소음 수준이다. 한 곡의 노래 뒤에, 좀 쉬었다가 버턴식으로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낫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불사조>까지 몇 곡을 준비하면 되는 일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난영’의 길지 않은 가수 인생을 마저 돌아다본다. 삼천리 극단을 따라나선 막간 가수 이옥례를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에게 소개한 것은 작사가 강사랑이다. 이난영이란 예명도 태양극장장이 붙여줬다는 설과 이 철 사장이 붙여줬다는 설이 있다. 손목인 곡으로 데뷔하려다 <불사조>(김능인/문호월)로 데뷔한다. 1935년 이난영을 스타로 만들어준 <목포의 눈물>을 만나고,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 김해송과 연습을 하다 사랑에 빠진다. 20세에 결혼을 하고 연년생으로 9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오빠 이봉룡도 처남에게 음악을 배워 명드러머가 되고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 백년설의 <고향설>,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같은 명곡을 작곡까지 하게 된다.

다혈질에 반골 기질까지 있지만 김해송은 사업 수완은 좋아 8.15 광복 직전 스카라극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약초악극단을 조직해 오케악극단의 중진 노경희(영화배우), 김진규(김보애의 남편), 이예춘(이덕화의 아버지)까지 빼내오기도 했다. 다시 KPK악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중 6.25 난리 통에 납북되었다.

이난영은 여장부였다. KPK악단을 재건해 주한미군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의 딸들을 ‘김시스터즈’(숙자·애자, 민자는 이봉룡의 딸)로 키워 K-pop의 원조 걸그룹(물론 이난영도 포함된 ‘저고리시스터즈’가 있긴했지만)으로 만들어냈다. 전쟁 직후 국산영화 면세 조치로 악극이 설 자리를 잃자, 미군 부대 위문 전문단체로 돌파구를 찾았다. 미국으로 떠나는 딸들에게 “성공해서 나라를 빛내고 돌아와라. 안 그러면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대한의 어머니다운 당부를 했다는 벽화가 노적봉으로 올라가는 ‘옥단이길’에 그려져 있다. 이때, 미망인이나 다름없는 이난영에게 남인수는 많은 걸 챙겨주는 고마운 존재여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1962년 7월, 무더위 속에 남인수가 폐병으로 죽자, 부인 김은하보다 더 슬피 울면서 “나를 비로소 여자로 눈뜨게 해주었고, 여자로 대접해 준 사람이 남인수였다.”고 넋두리를 했다고 전한다. 그 후 김시스터즈를 따라 미국에서 살다 귀국해 술에 의지했던 이난영이 아들의 집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 1965년 4월 11일 향년 49세였다. 한 도시에 2개의 같은 노래비가 서 있는 스타, 그가 ‘목포의 딸 이난영’이다. 고인은 말이 없으나 오래도록 말한다. “더 이상 노래 부르지 못하나 영원히 노래한다.”

비릿한 선창, 다시 부르는 목포의 노래

 갯내음이 ‘후욱~’ 에워싸는 선창가로 나온다. 이제는 수협직판장이 되어버린 공간, 째보 선창도 사라졌다. 사랑이 떠나는 항구의 노래는 여전히 눈물을 닦으며 불려진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비 젖은 선창머리 돛대를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목포는 항구다, 조명암/이봉룡/이난영, 1942.)>

<목포의 눈물>과 같은 간판곡을 빼고도 목포의 노래는 한참 줄을 세워야 한다. 이미자가 부른 <목포의 달밤>(반야월/고봉산), 남진이 부른 <목포의 연가>(강사랑/고봉산)와 <내 고향 목포>(정두수/박춘석), 유춘산이 부른 <안개 낀 목포항>(박금호/김종택), 김광자의 <날 버린 목포항>(최치수/김성근), 조미미의 떠나온 목포항(감우동/김부해), 김지애의 <목포 부르스>(박춘석 작사·곡)가 떠나는 노래다. 돌아오는 목포의 노래도 있다. 문영애가 부른 <목포로 간다>(반야월/고봉산)는 1960년대 목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간 가난한 사람들이 서울살이에 지쳐서 다시 돌아올 때, 품을 벌려 안아주는 따뜻한 고향을 노래했다. 조용필이 1982년 <목포항>(김갑춘 작사·곡)을 노래한 것이 1975년 발표된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곡)이후인 것으로 보면 지역적 좌우 대칭의 구색을 갖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남진이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만든 <님 오신 목포항>(이도화 작곡) 또한 호남의 정서를 반영한 노래다.

그 밖에도 제목에 ‘목포’가 들어가는 노래를 챙기다 보면 기가 질릴 정도다. <목포항 부르스>(남수련), <추억의 목포항>(김연자), <목포 아가씨>(김화자), <갈매기 우는 목포항>(차은희), <눈물의 목포항>(손인호), <님 없는 목포항>(방운아), <돌아온 목포항>(왕미령), <목포 연락선>(조미미), <목포의 비가>(차은희), <목포의 사랑>(장세정), <목포의 소야곡>(원희옥), <목포항 뱃사공>(권해성), <목포항선술집>(신향), <목포항 아가씨>(박건), <목포항 에레지>(유인수), <목포항 처녀>(윤정), <목포항 탱고>(하춘화), <목포항 연락선>(권금자), <분홍치마 목포항>(남백송), <비 오는 목포항구>(갈매기자매), <석양 지는 목포항>(유성진), <울고 갈 목포항구>(김명환), <이별 많은 목포항>(남미랑), <이별의 목포항구>(서주연), <이별의 목포항>(지화자), <임 없는 목포항>(성영주), <잊을 수 없는 목포항>(박재홍), <정든 목포항>(최갑석), <하룻밤 목포항>(남일해), <황혼의 목포항>(유인수), <삼학도 갈매기>(서주연), <울며 헤진 목포항>(유성진)까지다. 

찾아낸 것만 이 정도니 아마 작사·작곡자들은 제목이 겹치지 않도록 하면서 가사를 쓰는데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목포 노래만으로도 KBS‘가요무대’ 한 달 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이제 왜 한국대중가요의 골목길 순례를 목포에서 시작하려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오래된 목포의 흔적, 근대사문화거리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항동시장을 지나 ‘근대사문화거리’로 들어선다.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원도심은 목포의 개항과 일제 치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도 1호선과 2호선의 옛 도로원표가 있는 곳이니 관청거리다. 오래된 목포를 한눈에 보려면 노적봉 아래 옛 일본영사관의 붉은 벽돌 건물 안에 있는 ‘목포근대역사관1관’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에 꾸며져 있는 2관에서는 나카마치(中町)와 혼마치(本町)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과 실물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줄 자료는 없다. 원도심은 관청과 금융의 중심인데다 일본인 거주지여서 팔십 줄에 들어선 목포 토박이들도 어릴 때 별로 와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조선내화의 주인이었던 이훈동의 정원 부근에 있었다는 카바레와 술집, 째보 선창이 가까운 곳에는 지나가는 남정네의 소매자락을 잡아끄는 밤 부두의 야화들이 나와 있던 ‘힛바리 골목’이 있었다. 광복 후에는 삼학도 앞에도 다닥다닥 붙은 홍등가가 있어서 마도로스나 청년들의 젊음을 붙잡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그야말로 일본 엔카의 전설 미조라 히바리의 ‘미나토 마치 주산반지’(港町十三番地)의 정서가 그려진다. 

목포근대사문화거리에는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서울말과 경상도 말씨까지 시끌벅적하다. 근자에 벌어진 이 거리의 손혜원 소동을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끼리끼리 적산을 사 모은 것은 문제가 있지만 퇴락해가는 목포 구도심을 이렇게 온 국민에게 알린 적이 있냐고 영 싫지만은 않은 목포 토박이의 표정도 사실이다. 눈물이 말라붙은 비릿한 항구를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저인망이 비켜 갔기에 오래된 목포는 근대사의 거리에 주역으로 남을 수 있는 적산(敵産)을 지킬 수 있었다.

조용연 여행작가  yeoju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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