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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80. 사람마다 자기 음식을 달게 먹고 사람마다 자기 옷을 예쁘게 입으면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80. 사람마다 자기 음식을 달게 먹고 사람마다 자기 옷을 예쁘게 입으면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20.08.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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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얼마 전 여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주장한 것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모두 세종시로 옮기겠다.”

오마이뉴스는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에 의뢰해 찬반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응답자의 53.9%는 이전을 찬성한다고 했고 이전 반대는 34.3%로 나왔습니다. 지역으로는 지방, 이념성향은 진보, 세대는 젊은층에서 찬성 비율이 높았고 지역으로는 서울과 수도권, 이념성향은 보수, 세대는 노년층에서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이 분석 결과를 보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쪽에서는 반대 비율이 높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서울과 수도권은 주거 불안이 심각합니다. 집을 많이 가진 사람은 적게는 2-3채에서 많게는 수백 채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집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집 장사가 되는 까닭은 국민의 절반이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좁은데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보니,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게 됩니다. 수요가 많으면 공급자는 가격을 올리기 마련입니다.

도덕성에도 호소하고 엄격한 법률로 투기를 억제하려 하지만 공염불입니다. 도덕성은 ‘나는 몰라’하면 그만이고 법망은 얼마든지 피해갈 구멍이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밀집된 사람들을 분산시키는 노력이 필요한데요. 국회와 청와대 이전은 인구 분산을 유도하는 중요한 정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당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울과 수도권 집값을 못 잡으니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다. 부동산정책 실패로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일 뿐.”

자꾸만 올라가는 서울과 수도권 집값과 전월세값 때문에 시민들은 정부를 비난합니다.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질책은 당연합니다. 야당대표 주장대로 정말 국회와 청와대 이전이 정책실패를 잠재우려는 꼼수라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야당대표가 ‘여론을 잠재우려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회와 청와대 이전은 분명 서울과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을 안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는 것을 역으로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과반이 찬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심은 한 곳에만 있지 않고 곳곳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철학자 들뢰즈(1925~1995)의 말을 잠깐 들어보죠.

“리좀(Rhizome)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관계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관계를 이루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들뢰즈, 『천 개의 고원』중에서)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는 지피식물’로 표현됩니다. 나무(수목형)는 뿌리, 가지, 잎이 위계를 가지고 기존에 수립된 계층 질서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리좀은 아주 매끄럽게 홈을 지나가며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곳곳에 중심이 있게 되는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는 서울만이 중심입니다. 모든 길이 서울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견고합니다. 매끄럽게 지나갈 수도 없고, 서울이라는 어마어마한 홈통에 국민이 빠져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마다 자기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옷을 예쁘게 입으며, 자기 집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기 풍속을 즐겨 하리라.”

흐뭇한 웃음이 나오는 이상향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의식주에 만족하고 놀이까지 즐거우니 말입니다. 이런 삶을 가져오려면 노자는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노자의 이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들뢰즈의 리좀과 연결하고 싶습니다.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은 스스로 중심이 되어 자급자족하며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서로 공격하지도 않으며 각각 뿌리를 내려 리좀이 되고, 서로 사이가 되고 ‘오직 결연관계’가 될 뿐인 것이죠.

 

세종시로 국회와 청와대가 옮겨가는 일은 리좀과는 분명 다르긴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대화 된 중심은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거대한 홈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이 행복할 리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노자의 주장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서로 바라보이고 개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 가지 않는다.”

완벽하게 끊어진 관계를 가지라는 주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말한 ‘리좀’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노자의 주장은 ‘위계질서’나 ‘고정된 계층구조’ 같은 것을 해체하고 있으니까요. 각각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하나의 중심으로 모아들이려는 것이 바로 권위적인 방식입니다. 작고 다양한 신들을 다 죽이고 위대한 하나의 큰 신을 만들어서 강력한 통치를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자 도덕경 80장 : 小國寡民(소국과민)이면 使有什佰之器而不用(사유십백지기이불용)하고 使民重死而不遠徙(사민중사이불원사)하리라. 雖有舟輿(수유주여)이나 無所乘之(무소승지)하고 雖有甲兵(수유갑병)이라도 無所陳之(무소진지)하리라. 使人復結繩而用之(사인부결승이용지)하여 甘其食(감기식)하고 美其服(미기복)하며 安其居(안기거)하고 樂其俗(낙기속)하리라. 隣國相望(인국상망)하여 鷄犬之聲相聞(계견지성상문)이라도 民至老死(민지노사)하도록 不相往來(불상왕래)하리라.>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으면 수십 수백 가지 기계가 있어도 쓰지 않게 할 수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겨 멀리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탈 일이 없으며 비록 갑옷과 병장기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펼칠 일이 없으리라. 사람마다 다시 새끼를 꼬아 쓰게 하면 저마다 자기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옷을 예쁘게 입으며 자기 집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기 놀이를 즐겨 하리라. 그리하여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며 닭과 개 우는 소리 서로 들려도 사람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 가지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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