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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78. 남 탓을 자꾸 하는 까닭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78. 남 탓을 자꾸 하는 까닭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0.07.2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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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듣기 좋은 소리’ 3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내 자식이 밥 먹는 소리, 내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 내 자식이 글 읽는 소리. 쓰고 보니까 좀 국한되는 느낌이 있군요. 조선 시대 그것도 농사꾼 아버지가 듣기 좋은 소리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떤 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일까요? 물소리 바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대자연의 소리도 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음악도 있겠고요. 누군가 나와 내 가족을 칭찬하는 말도 참 듣기 좋은 소리일 겁니다. 물론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듣기 좋은 소리는 달라지기도 합니다.

반면 ‘듣기 싫은 소리’도 있습니다. 위협하거나 무섭게 하는 대자연의 소리도 듣기 싫겠지만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도 듣기 싫을 겁니다. 나는 무엇보다 듣기 싫은 소리가 있는데요, 누군가를 험담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험담(險談)이란 ‘험한 말’ 또는 ‘헐뜯는 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험담의 대상이 동석하고 있다면 그건 험담이 아니라 ‘비판’이 될 겁니다. 헐뜯음을 당하는 대상이 곧바로 자기변호를 할 수 있으니까요. 험담이란 낱말이 뜻하는 건 그 대상이 동석하고 있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고, 나쁘다고 말하는 행태인 것이죠.

누군가 험담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듣기 싫어합니다. 가끔 동조해서 같이 험담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건 패거리를 지어 떠들어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통은 못 들은 척하거나 얼른 화제를 돌리거나 할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험담이란 ‘듣기 싫은 소리’는 힘이 굉장히 셉니다. 자칫하면 그 힘에 끌려 다른 사람을 험담하기 일쑤라는 거죠. 나 자신도 가만히 되돌아보면 참 남들을 많이 험담하고 살아왔습니다. 남을 험담한다고 해서 내가 더 우월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험담하는 힘에 휘둘리는 걸까요?

여기서 노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문제는 누구도 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움과 약함이 단단함과 강함을 이긴다는 것이죠. 스스로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때 타자를 험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남을 헐뜯는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별로 못 본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남을 자꾸 헐뜯는 것은 스스로 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단단하고 강한 척하려 하거나.

그런데 보통 우리는 약하다는 소릴 듣기 싫어합니다.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이지만 말이죠. 그런데 부드러운 존재는 연약함을 자연스럽게 동반합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는 남을 헐뜯지 않는다.’면 과연 유약(柔弱)한 존재는 어떻게 타자를 험담하지 않는 경지에까지 도달했을까요? 그 실천법은 어떤 모습일까요? 당연히 노자는 대답을 준비해뒀습니다.

“때와 티끌을 자기 몸으로 받는 자이며, 상서롭지 않은 일을 자기 몸에 받아 안는 자이다.”

때와 티끌은 더럽고 상서롭지 않음은 뭔가 불안한 일입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내 몸에 받아 안는 자를 ‘약하고 부드러운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요? 우선 눈에 쉽게 보이는 사물로는 ‘물’이 있습니다. 물은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며 세상의 온갖 티끌을 다 받아들이죠. 가장 큰물은 바다인데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 바다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산의 옹달샘이나 냇물이나 강물을 탓하지는 않을 겁니다. 냇물이나 강물이 가져오는 세상의 온갖 쓰레기를 그저 묵묵히 받아 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는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한 나라의 때와 티끌을 받아 안는 자는 사직의 주인이며, 한 나라의 상서롭지 않음을 받아 안는 자는 왕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어머니, 좋은 아버지는 자식을 험담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때와 티끌, 자식의 상서롭지 않은 일을 내 것으로 받아 안기 때문에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죠.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이웃도 다 그렇지 않을까요?

 

<노자도덕경 78장 : 天下(천하)는 莫柔弱於水(막유약어수)이나 而攻堅强者(이공견강자)는 莫之能勝(막지능승)하나니 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이니라. 弱之勝强(약지승강)하고 柔之勝剛(유지승강)은 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이나 莫能行(막능행)하나니라. 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하기를 “受國之垢(수국지구)를 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요 受國不祥(수국불상)을 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이라” 하나니 正言若反(정언약반)이라!>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물과 바꿀만한 것이 없느니라.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문제는 누구도 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때와 티끌을 자기 몸으로 받는 자를 사직의 주인이라 부르고, 한 나라의 상서롭지 않을 일을 자기 몸에 받아 안는 자를 세상의 왕이라 한다.”고 했으니 바른말은 마치 우리 상식과 반대가 되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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