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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담-긍휼히 여기사‘긍휼’은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 공감과 나눔의 바탕 가치
조용연 주필

유년시절 교회에서 들은 말, 어려워도 잊혀지지 않아

어릴 때 동네 언덕에 있는 교회를 기웃거리며 몇 번은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순전히 예배가 끝나고 나면 나눠주는 사탕을 얻어 먹기 위해 꽤 긴 시간을 허리를 꼬며 앉아 있어야 했다. 그때 목사님 설교의 내용은 거의 기억에 없는데 유독 한 단어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말 뜻도 모른 채 60년 세월이 흘렀다. 긍휼(矜恤)이란 꽤나 어려운 단어를 품고 살아온 시간이 꽤나 길었다. 사전을 다시 찾아 보아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심‘이다.

=긍휼히 여김은 세상 만물을 대하는 기본이어야

예나 제나 사람들의 일상은 먹고 사는 일로 늘 허덕거려야 했다. 부자가 긍휼의 대상에 끼일리가 없다. 하기야 부자의 고뇌까지 이해한다면 그도 불쌍한 존재의 축에 들테니 긍휼의 범주에 얹어 줄 수는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의 증상은 대립과 갈등으로 고름이 터져 나오고 있다. 쉽사리 처방이 나오기도 어려운 과제 앞에서 개인은 개인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저마다의 고민에 싸여 있다. 거대 방송의 독점적 지위를 신뢰하지 못하는 개인은 무리를 이루어 SNS의 비좁은 공간에다 똬리를 틀고 대립의 항전을 한다. 무기가 빈약하니 독설의 강도는 점점 더 해져 ‘노란 딱지’ 수준에 이르러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서로가 말로는 공론의 장에서 상대를 설득하려 한다지만 장벽은 더 높아져 간다. 말에, 글에 품위는 젖혀 둔다. 완곡한 비유, 딱 떨어지는 은유,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말 속에서 시대의 철학을 녹인 담론을 찾기는 어렵다. 이념의MSG를 친 음식에 익숙한 사람들 끼리끼리 ‘독설의 광장’에 모여 소리친다.

어느 날 밤잠을 안 자가면서 열혈활동을 하던 한 SNS전사가 “아, 다 싫다. 그냥 잠적하고 싶다.”며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일을 기억한다. 씨름판의 샅바를 너무 오래 꽉 쥐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는 순간 되치기 한판에 그냥 넘어가 버린다. 여백이 없는 그는 분명 ‘긍휼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줘야 할 존재다. 물론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왔다.

=측은함은 공감의 출발이자 나눔으로 이어져

긍휼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사바(娑婆)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쌍하며, 갈등이 끝없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일이 얼마나 측은한 일인가 하는 원론적인 명제에 동의해야 대립의 강 저편을 볼 수 있다. 거기 비장하게 날을 벼리고 있는 이들의 세계를 아주 조금이라도 공감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갈등이 대립하면 “길을 막고 물어보라”고 했다. 세간의 보편적 정서가 뭐냐는 데서 공감을 논했다. 뭐 정치, 경제, 외교, 그런 주제 말고 생활 주변만 해도 그렇다. 윗집서 생긴 층간소음이 달팽이관을 통해 더 크게 느껴질 때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기 쉽다. 순간 ‘긍휼 모드’로 바꿔본다. “어려운 세상에 자식들 여럿 키우느라 얼마나 힘이 들까”하고 공감하는 순간 내 마음의 불길은 바로 잡힌다.

긍휼이 있어야 나눔으로 이어진다. 나눔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감한다는 나눔, 아직 공감하지 못하지만 ‘거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할 때 우리 삶에 여백이 생긴다. 글 한 줄, 사진 한 장을 올리면서도 위로받고 싶어 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릴 때, 댓글 한 줄에도 우리는 진짜 공감을 나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긍휼은 값싼 동정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보다는 확실히 위에 있는, 높은 정신세계의 한 줄기 빛이다. 내가 나를 긍휼히 여기면 눈물이 흐르고 누가 나를 긍휼히 여긴다면 잠시 세상이 천국이 된다.

조용연 주필  yeojupe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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