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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74. 이제 선진국은 멈춰도 된다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74. 이제 선진국은 멈춰도 된다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0.06.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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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후진국의 경우 성장이 중요하지만 선진국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에  포함시켜야 하죠. 선진국들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에라도 성장을 안 하는 게 좋고요. 문제는 성장의 질입니다. 성장을 얼마나 공평하게 나누느냐에 있죠. 온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경제의 목표라면 성장은 수단입니다. 성장을 하면 덩치가 늘어나 나누기도 쉽고 목표를 이루기가 수월하죠. 문제는 신자유주의체계에서는 성장을 해도 그 열매가 상류층에게 집중되는 데 있어요.”

경향신문에서 기획한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시리즈 1편으로 장하준 교수와 대담한 내용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제에서 목표는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죠. 목표를 이루자면 성장이 필요하니까 ‘성장’은 당연히 수단입니다. 그런데 수단에 불과한 성장이 마치 경제의 목표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본말이 뒤바뀐 것이죠.

그래서 장교수는 ‘더 이상 성장이 필요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수단이 목표 노릇을 하는 신자유주의체계의 경제성장은 필요 없다는 것이죠. 성장의 열매가 상류층에게만 집중되어 대다수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가 없으니까요.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없는 까닭은 ‘성장을 공평하게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장교수는 진단합니다. 현재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데요. 성장 열매를 나누는 시스템인 복지제도가 잘 된 나라의 사람들은 고통을 덜 받고 더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코로나 19 감염은 필수노동을 하는 취약계층에게 훨씬 위험한데요, 신자유주의체계로 경제가 작동하는 나라들은 이들을 돌보지 못합니다.

성장의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취약계층 뿐아니라 온 국민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기본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도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안정적인 기본소득제도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음도 큰 공감대를 얻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여기서 노자의 진단을 들어 봅시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죽음을 수단으로 써서 두렵게 할 수 있으랴!”

노자는 ‘사람들이 어떤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곧 거대한 위험이 닥치게 된다’라고 경고한 적도 있는데요, 이 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죽이겠다는 위협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에 사람들이 내몰려있다면, 이미 그 사회나 국가는 조금도 안전하거나 평화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자는 이런 비유를 듭니다.

“죽임을 맡은 사람이 죽여야 한다. 그런데도 죽임을 맡은 사람을 대신해 죽이는 건 마치 훌륭한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베는 것과 같다. 훌륭한 목수가 있는데도 대신 나무를 벤다면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죽임을 맡은 사람’을 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늘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설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건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 내 삶이 행복하고 평화롭다면 죽음이 오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을 편안하고 평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 또는 제도를 ‘죽임을 맡은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여야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노자는 ‘위기자(爲奇者)’라고 합니다. 기이한 것, 특별한 것, 뛰어난 것을 ‘기(奇)’라고 하는데요. 그 기를 만드는 자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일반 대중들의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해치는 기이한 것들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기이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글의 맥락과 연결 짓는다면 ‘나누지 않는 성장 열매’나 ‘목표와 수단의 본말전도’거나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지나친 발전’ 등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것들을 죽이기 위한 제도를 만들거나, 그 제도를 시행하고 정착시키는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리더 그룹은 ‘죽임을 맡은 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자가 비유로 든 것처럼 훌륭한 목수가 있는데도 괜한 오지랖으로 나무를 베겠다고 나서다가 손을 다치지 말라는 것이죠. 사려 깊지 못한 제도나 어설픈 솜씨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으니까요.

<노자 도덕경 74장 : 民不畏死(민불외사)이면 奈何以死懼之(내하이사구지)리오. 若使民常畏死(약사민상외사)이면 而爲奇者(이위기자)를 吾得執而殺之(오득집이살지)하여도 孰敢(숙감)이리오. 常有司殺者殺(상유사살자살)이니 夫代司殺者殺(부대사살자살)은 是謂代大匠斲(시위대대장착)이니 夫代大匠斲者(부대대장착자)는 希有不傷其手矣(희유불상기수의)하나니라.>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음’을 가지고 두렵게 할 수 있으랴.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늘 죽음을 두려워하게 한 뒤에, 부정한 짓을 하는 자를 내가 잡아 죽이면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죽임을 맡은 사람이 죽여야 한다. 그런데도 죽임을 맡은 사람을 대신해 죽이는 건 마치 훌륭한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베는 것과 같다. 훌륭한 목수가 있는데도 대신 나무를 벤다면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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