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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안성천(안성·평택)① 

한국의 강-안성천(안성·평택)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6.22 08:38
  • 수정 2020.06.2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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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의 강 안성천, 평택들판을 적시다

안성이라는 이름은 ‘안성맞춤’이라는 명사로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 조선의 3대 시장이라는 안성장의 자존이 안성에 ‘배타적’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도 사실이다. 차령산맥이 맥을 죽인 언덕 삼죽에서 안성천은 출발한다. 이야기가 무성한 고장 안성을 거쳐 평원과 소택지가 주류라 산이 귀한 평택을 지나간다. 한강권역이라 그 휘하에 있다 해도, 한강과는 몸 한번 섞지 않는 오만한 강이다. ‘안성천 수계’라는 혼자만의 물길을 뽐내며, 국가하천인 황구지천, 오산천, 진위천의 물까지 모아서 아산만 방조제까지 뒷짐 지고 흐른다.

 

=죽주의 삼 형제 중 막내, 삼죽에서 출발하다 

국가하천치고 유독 안성천의 시발은 희미하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산맥이 북한 땅 철령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동북방으로 내려오다 한강까지 건너 그 소임을 다하고 멸하는 꼬리에 용인과 안성이 있다. 게다가 태백산맥에서 분기하여 계방산, 치악산으로 뻗은 차령산맥도 여주 오갑산부터는 흐지부지하다 안성 서운산에서 다시 산맥의 의관을 갖추는 처지다. 그 중간은 다들 잔구(殘丘)성 산지이니 오래된 자존의 고읍 죽주(竹州)의 고개를 넘어도 고개인 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죽산(竹山)의 할아버지 함자인 죽주의 막내 삼죽(三竹)에서 안성천의 여정을 시작한다. 땅이름의 속성으로 보아서도 대나무 죽자가 들어간 고장은 대개가 평야 지대에 위치한다. 삼죽에서 안성 읍내까지 안성천을 따라가는 길은 1927년 개통된, 비운의 철도 안성선이 지나가던 길이었다. 천안에서 장호원까지 19개 역 가운데 안성-장호원 구간 11개 역 41.4km가 ‘선로공출명령’에 따라 뜯겨나갔다. 태평양전쟁에서 벼랑으로 몰리고 있던 일제가 여염집 놋그릇까지 다 빼앗아 가던 1944년의 일이다.

‘그해 여름’으로 표현되는 8.15 광복의 그 날 무더위도 이랬으리라. 턱까지 차오르는 대지의 열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강둑도 달구어져 있다.

이내 ‘동아방송예술대학교’가 길목에 나타난다. 1995년 ‘동아방송전문대학’이 이 산골짜기에 첫 삽을 떴을 때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20년의 세월은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전문고등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디마’(Dong-Ah Institute Media and Arts)라는 애칭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53만 평 부지에 5개 학부 16개 학과가 있으니 사막의 기적을 이뤄낸 ‘동아건설’의 배포답다. 그때만 해도 미디어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세상을 지배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할 때였다. 최원석 회장이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겪은 방송 세계에 대한 선구안도 절대적 바탕이 되었으리라. 무거운 장비를 들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학생들이 바로 화려한 무대 뒤의 사람들이 된다. 내신 수능 등급만으로 전국 상위에 속하니 방송과 무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안성맞춤’의 고장, 고읍 안성

삼죽에서 안성 시내는 이십 리 남짓하다. 여전히 읍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한산하다. 경기도에서도 늦게 시로 승격한 안성이 대구·전주와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에 들었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안성장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안성장은 한양장보다 물목이 2가지가 더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안성장은 유기그릇과 가죽 꽃신이 유명했다. 모두 사대부집 소요였다. 안성의 제기 그릇이 작고도 아담해서 조선의 양반들이 ‘안성맞춤’이라 했다 한다. 신관 사또가 올 때마다 그 또한 미리 주문(?)받은 유기그릇을 상납하기 위해 공출을 닦달했으니 중간착취는 오죽했으랴. 안성 사람들이 꾀를 내서 “빈대도 낯짝이 있지 이래도 턱없는 짓을 하겠냐.”며 미리 세워준 ‘영세불망공적비(永世不忘功績碑)’가 43개나 줄지어 서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안성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배타는 바깥세력에 쉬이 굴복하지 않는 기질이다. 이는 몽골군의 침공 때 저항했던 죽주산성 전투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일어선 ‘고춧가루 장군 홍계남’으로 이어지는 뿌리 깊은 정신이다. 오죽했으면 일제 때도 불매운동으로 일본 점방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을까. 하기야 장터가 크게 번성했으니 그 고을 사람들이 셈에 빠른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누군가 말했다. 당초 서운면 일대에 들어서기로 거의 계약단계까지 갔던 ‘자연농원’(에버랜드의 옛 이름)이 몇몇 지주가 돈 몇 푼 더 받으려 고집부리는 바람에 용인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끌탕을 했다고 전한다.

조선조 위대한 문사,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한 무대가 안성장이다. 남산 딸깍발이 허생원이 변부자에게 1만 냥을 빌려 안성장에서 밤, 대추를 비롯한 제수용품을 사다 팔아 10배를 튀겨 부자가 된다. 요즘말로 매점·매석을 한 ‘악질경제사범’이다. 그 돈으로 무인도에 들어가 도둑들과 3년간 농사를 지어 백만금을 벌어 50만 금은 바다에 버리고 한양으로 와서 빌린 돈을 당당하게 갚았다. 변부자는 큰손 투자자였고, 허생원은 양식 있는 재테크의 귀재였던 것이다. 

안성이 ‘남사당놀이패’의 본고장이 된 것도 결국은 장터의 번성에 있다. 서운산 자락에 있는 청룡사에서 숙식을 하고 있던 남사당패가 192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안성의 자랑이다.   전설적인 여장부 ‘바우데기’가 꼭두쇠가 되어 줄 타고, 춤추는 전설적 기예는 민초놀이의 상징으로 맥을 잇고 있다. 바우덕이의 묘가 청룡사 가까이 자리 잡고 있으니 죽어서도 안성이 본향이다. 황해도가 무대인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인물들이 안성 땅까지 연을 맺는 것도 천민 광대들 삶의 바닥과 맥이 닿아 있다. 청룡사, 칠장사 같은 절집들이 이들을 ‘불목하니’라도 시켜 추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게 먹이고, 재워준 것 또한 가없는 구휼(救恤)의 흔적이다.

안성의 대로변은 벌써 하우스에서 자란 포도가 가판대에 즐비하다. 1901년 귀화한 프랑스신부 안토니오가 가져온 마스캇 품종의 포도나무 세 그루가 안성을 포도의 고장으로 만들어 이 여름과 가을을 풍성하게 한다. 안성이 수도권 산업지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징표는 인구의 7%가 넘는 외국인 근로자가 함께 살고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안성 시내 들머리에 ‘안성맞춤랜드’라는 안내판이 맞아 준다. 시대의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안성맞춤이 그야말로 안성의 고유한 전통이자 자랑거리라면 ‘랜드’를 붙인 건 가벼워 보인다. ‘안성맞춤공원’이라고 하면 임팩트가 약한가? 

=우유를 먹이고 싶은 지도자의 꿈, 한독목장과 안성팜랜드

안성 초입에서는 올해 혹독한 가뭄을 겪은 금광저수지의 물이 합류하고, 안성 시내를 벗어날 즈음 한천이 더해진다. 금광저수지가 평택호 수계와 연계하는 예산을 확보했다고 자축하는 플래카드가 펄럭거린다. 한천은 고삼저수지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사실 안성천 상류보다도 수원이 더 풍부하다. 강둑길을 조금 벗어난 길, 공도읍에 있는 ‘안성팜랜드’로 핸들을 튼다. 여름날 물놀이 동산쯤으로 여겨지는 이 언덕의 내력은 눈물겹다. ‘한독목장’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서독으로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 차관을 구걸하다시피 떠난 박정희 대통령의 여정 속에 탄생했다. 뽀얀 서양 아이들을 보면서 버짐꽃이 피고, 기계충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땅의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우유 한번 마음껏 먹였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듯 말했단다. 그렇게 1969년 차관 50만 달러와 홀시타인 200마리로 시작한 목장이다. 지금껏 농협이 관리하고 있고, 농협과 관련한 연구·교육기관들이 이 구릉에 자리 잡게 된 내력이다. 1974년 통계로 안성에 116개의 목장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원주택지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대림동산’도 이제는 음식점과 숙박업소 천지로 변했다. 그 옛날의 고즈넉한 서정을 기대한다면 실망 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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