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최종편집:2024-04-24 14:35 (수)

본문영역

여강여담-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

여강여담-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20.06.22 08:38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 공식용어 ‘6.25 전쟁’ 보다 ‘한국전쟁’이 널리 쓰이다니

결코 잊을 수 없어 뼈아프게 기념하는 그날, 1950. 6. 25

조용연 주필

‘6. 25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흘렀다. 정부도 6. 25전쟁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70년이란 세월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해 태어난 아이가 고희를 맞았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그 전쟁의 참혹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도 줄어가고 있다.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6. 25의 연대기를 기억하는 젊은이도 줄어가고 있다. 심지어 남의 나라 전쟁쯤으로 알고 있는 형편이니 지하에서 눈조차 못 감은 호국영령이 보신다면 통곡할 일이다.

‘6. 25전쟁’을 ‘한국전쟁’으로 부르는 겉멋이 늘어가

언제부터인가 ‘6. 25전쟁’이란 말을 버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상용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 전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세대만이 아니라 8순을 헤아리는 사람까지 가세했다. <가요무대>나 <한국인의 밥상>의 진행자도 ‘한국전쟁’이라고 자연스레 말한다. 아니 무감각하다. 아마도 자막이나 원고를 써주는 작가가 신세대여서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심지어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고위 인사조차 ‘한국전쟁’이라고 자신의 기고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6.25전쟁’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전교조의 등장과 좌편향 역사관이 한국 현대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Korean War’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해서 쓰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주장할 것이다. 나도 미군부대에 다니셨던 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영어 서적이 있다. 미 국방성이 1954년에 펴낸 <The Korean War>라는 두꺼운 책이다. 미국이야 당연하다. 적어도 한반도의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제3자’니까. 그러니 그렇게 부른다지만 우리는 이 ‘현재진행형 전쟁’의 당사자다. 북한의 ‘6.25남침’이란 사실(史實) 앞에 분노하는 절대다수의 국민이 있는가 하면, ‘6. 25북침’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집단도 있다. 이 논란은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침공의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슬쩍 비켜 가는 위장막에 적합하다.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현실에서 논란을 자초하기보다는 6. 25전쟁의 ‘당사자성’에서 떼어내어 ‘객관적’이라는 명분으로 희석하는 효과가 지금 <한국전쟁>의 상용화(常用化)로 힘을 불려가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전쟁기념관’ 전시물의 명패에도 ‘한국전쟁’이라고 표기해 높은 것이 있어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물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영문 표기야 당연히 ‘The Korean War’가 맞다.

국가보훈처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6월의 행사 일정’에도 ‘6. 25전쟁 70주년 기념식’이라고 되어 있다.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공식용어이자 국가기념일이다.

표준 국어대사전에도 ‘한국전쟁은 6.25전쟁과 동의어’라고 표시해 놓았으니 더구나 신세대가 무감각하게 쓰는 일을 나무랄 일도 못 된다. 그들에게 역사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시 알려주어야 할 책무가 6. 25를 직·간접으로 기억하고 있는 세대에게 있다.

우리는 일제에 항거한 1919년의 그 날을 ‘3.1절’로 기념하고, 1945년의 감격을 ‘8.15광복’으로 기억하지 ‘항일만세의 날’이거나 ‘일제 해방의 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숫자, 날자에 대한 집착은 <4.19>, <5.16>, <5.18>, <6.10>, <6.15>, <10.26>, <12.12>에서 명료하다. 수많은 날짜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그 기억을 붙잡아 두고 있다. 하물며 6. 25 노래의 첫 소절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로 시작하지 않는가. 우리 시대는 ‘6.25 사변’, ‘6.25 동란’, ‘6. 25 전란’, ‘6. 25전쟁’이란 표현으로 기억이 바래지는만큼 용어도 달라져 왔다. 그러나 어찌 잊을 것인가. 전사만 해도 국군과 유엔군 17만5천 명, 북한군과 중공군 52만 명, 3천만 민족(당시)의 10%에 해당하는 300만 명이 사망하고 1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한 전란을 말이다.

최근 한 대학교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6. 25를 맞아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 또한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희생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시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사자 추모 ‘포피(양귀비) 배지’처럼 이념과 세대를 초월하는 국민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크다. 아직도 이름 모를 산하에 묻혀있을 122,609위의 유해 미발굴 국군 용사를 상징하는 숫자가 던지는 울림이 크다. 국군의 유해를 태극기로 감싸는 것은 그들이 태극기의 보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완의 <6. 25 전쟁>이다. 극동의 조그만 나라 <한국전쟁>이 아니다.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