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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오산천 · 진위천 (용인·오산·안성·평택)②

한국의 강-오산천 · 진위천 (용인·오산·안성·평택)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6.1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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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동탄을 지나 모천 안성천으로

오산천과 진위천은 황구지천과 함께 안성천 수계의 주요한 물줄기다. 
신갈저수지에서 전열을 정비한 물길은 아파트의 밀림으로 변해버린 동탄을 가로지른다. ‘상전벽해’란 말은 이럴 때 적확하다. 치솟는 집값을 견디다 못한 서울의 유민들이 새로 만든 서식지다. 강둑의 양안을 점령한 공장들은 1차산업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와 오산 미군비행장은 나라의 발전과 안보의 한 축이 오산천과 진위천변에 함께 매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공간좌표다.

=만기사와 박헌영의 그림자

진위에서 남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위천은 갈대숲으로 우거져 있으나 대단한 강폭은 아니다. 진위면 소재지를 막 벗어나면 좌측으로 절 하나가 산기슭에 걸려있다. 무봉산(208.8m) 만기사다. 산간도 아닌 절이 유명한 것은 보물(제567호)로 지정되어있는 고려 철조여래좌상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경찰대학에 지도 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불교학생회의 지도 법사로 있던 정무스님(조계종 원로 스님, 2011년 입적)이 한 때 이 절 주지로 계셨었다. 정무 스님은 유별나게 정갈하신 선승이었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는 예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부처나 누구나 모두가 같은 예를 올리고 받는 것이지 부처님만 손바닥을 보여 받드는 의례는 우리들이 근자에 만든 과공비례(過恭非禮)란 것이다. 정무 스님답다. 

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스님 왜 바쁘신데  경찰대학과 세무대학 불교학생회를 그렇게 열심히 지도하시나요?” “ 아하, 그거요. 세상 사람 100사람 불자 만드는 것보다 경관이나 세리(세무공무원)1명을 제대로 된 불자로 만들면 좋은 세상 만드는데 훨씬 도움이 되니까.  하하하...” 스님의 명쾌한 답이 귀에 쟁쟁하다.

또 한 분, 지금의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이다. 법랍 60년에 가까운 그가 세간의 눈길을 끈 것은 남로당의 주역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박헌영은 북으로 간 혁명가다. 그러나 그의 미완의 혁명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려졌다. 빨갱이와 반 빨갱이의 적대구조를 요지부동하게 만든 사상의 와류가 그를 삼켰다. 출가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었고, 그 연좌의 인연법은 뿌리 깊었다. ‘박헌영 전집’을 11년 만에 완간했다. 아버지를 신원(伸寃)하고, 아버지의 추종자들을 복권하기에는 이 세상이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원경은 종북의 각도에서 조명되기도 하지만 만기사 입구에 적혀 있다는 글귀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라는 말을 새기고 있으리라 믿는다.

=시인 조병화, 그가 있어 고향은 복사꽃 대궐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해 진목리를 지나면 이내 커다란 저수지 둑과 마주한다. 이동저수지다. 송전지, 어비리저수지도 모두 같은 지명이다. 경기도 제1의 저수지다. 이동저수지 물이 있어 진위천변 남사 들판이 목을 제대로 축인다. 그 저수지의 동쪽 끝이 난실리다.

조병화 시인이 거기서 태어났고, 어머니를 위해 1963년에 지은 농막이 있어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탄생했다. 시인이 있어 이 산골짝 마을은 복사꽃이 꽃대궐을 이루는 꿈의 고향이란 이미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일부러 거길 간 것도 조병화 시인의 꿈의 결정이 없는 진위천은 어쩐지 허전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의 대표적인 시 ‘오산인터체인지’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 맞춰 태어났다. 그도 오산인터체인지에서 내려 남사들판을 지나 고향 난실리로 가면서 인생사의 허무와 이별의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산을 넘는/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푸른 눈 긴 다리/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 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 십리. (‘오산인터체인지’ 전문)

<조병화문학관>은 소박하다. 다른 문학관과 달리 그는 살아서 13년을 스스로 가꾸었다. 그의 이미지는 베레모 아래에 웨이브진 은회색 머리칼과 담배 파이프를 쓰다듬는 마디 굵은 손가락에 잠겨 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종교’라고 말했던 시인, 오죽 그 시가 탐났으면 어느 시인 지망생은 법률 잡지에 자기가 쓴 시라고 아예 제목까지 통째로 투고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의 문학관은 ‘편운제(片雲齊)’라고 불린다. 한 조각 구름이라 ...... 아마도 시인의 평생 종교인 어머니가 “살은 죽으면 썩는다.”고 말한 그 당연한 사생관에 기초한 시인다운 작명이리라.

=송탄에 왜 ‘오산비행장’인가

자전거를 돌려나오면서 다시 보는 남사 들판, 진목교 위에는 ‘송탄상수원보호구역’을 해제하라는 요구가 걸려있다. 그런데 평택시가 요구하는 게 아니라 용인시가 소리를 지른다. 용인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팔당 물을 끌어다 쓰는 처지이니 좀 풀자는 얘긴데 어디까지 진실인지 지나가는 사람으로서는 쉬이 알 길이 없다. 

진위를 도로 지나 서탄면을 지나면 회화리 제방 건너가 ‘오산미공군비행장’이다. 송탄에 있는데 왜 오산비행장일까. 사연은 그렇다.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은 1951년 공군비행장을 설치하며 송탄비행장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미군 조종사들의 발음이 자꾸 꼬이자 교신의 편의를 위해 지도상에 바로 위에 있는 오산을 따서 O-SAN AIR BASE라고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1991년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를 폐쇄하고는 송탄이 미태평양 공군소속 미 7공군본부가 있는 극동 최대의 기지이다. 내 유년의 기억 속의 송탄은 누런 피엑스봉지 가득 맥주와 깡통, 소시지같은 미제물건을 안고 있던 양색시 은자 누나와  쑥고개, 기지촌, 서정리, 적봉신호장, 콘돔 풍선, 꿀꿀이죽, 공병상회같은 단어로 남아 있다.

황구지천까지 합류한 진위천은 훨씬 넓은 강이 되어 흘러간다. 강둑길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강 건너 고덕국제신도시개발사업이 평택을 들뜨게 했다. 인구52만 평택이 5년 뒤 80만을 내다본다. 고덕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과 미군 가족들까지 이주해 온 용산기지의 이전 호재에다 수서 발 SRT가 KTX가 본류에 합류하는 지제역도 평택이다. 이래저래 모두가 죽겠다는 판에 평택은 그래도 운이 좋은 셈이라고나 할까. 팽성대교에서 돌아가는 길, 평택역 불빛이 갑자기 더 환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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