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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오산천 · 진위천 (용인·오산·안성·평택)①

한국의 강-오산천 · 진위천 (용인·오산·안성·평택)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6.0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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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동탄을 지나 모천 안성천으로

오산천과 진위천은 황구지천과 함께 안성천 수계의 주요한 물줄기다. 신갈저수지에서 전열을 정비한 물길은 아파트의 밀림으로 변해버린 동탄을 가로지른다. ‘상전벽해’란 말은 이럴 때 적확하다. 치솟는 집값을 견디다 못한 서울의 유민들이 새로 만든 서식지다. 강둑의 양안을 점령한 공장들은 1차산업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와 오산 미군비행장은 나라의 발전과 안보의 한 축이 오산천과 진위천변에 함께 매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공간좌표다.

신갈, 답답한 수도권고속도로 정체의 상징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에버랜드로 들어가는 마성IC, 오른편 높은 봉우리가 석성산(471m)이다. 그 남서쪽 사면에서 오산천은 발원한다. 여정의 출발은 ‘동백호수공원’이다. 동백(東柏)이란 말이 낯설었던 시절, 수여선(수원~여주, 1972년 폐선) 철길은 어정역을 지나면서부터 오르막이었다. 기차가 조그만 경사면에도 미리부터 기가 죽는 것은 그 무거운 쇳덩어리의 속성상 불가피하다. 메주고개(멱조현)가 수여선 최고의 난관이었다. 그 언덕에서 내려오는 오산천은 간신히 건천을 면한 상태다. 강남대, 녹십자 앞을 흘러 신갈에 도착해서도 작은 개천 수준이다. 오산천의 제대로 된 물주머니는 신갈저수지다. 서울을 출발한 경부고속도로는 수원을 지나면서 마주하는 신갈저수지 물에 숨통을 틔우곤 했는데 이젠 방음벽으로 모두가 가려져 버렸다. 신갈은 수도권고속도로 정체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경부와 영동고속도로는 용서고속도로까지 뚫고, 확장해도 제자리걸음이다. 내게 신갈의 기억은 1968년 겨울, 중3 시절로 되돌아간다. 경부고속도로가 수원까지 1차로 개통되었다. 고속도로는 우리 시대가 경험해 보지 못한 꿈의 신작로였다. 자전거를 타고 수원에서 신갈인터체인지 구경을 떠났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친구를 뒤에, 프레임 위에 또 한 친구를 태웠으니 속도랄 것도 없었다. 지금 영통지구 초입인 영덕리 고개는 제법 높아서 자전거를 끌고 넘었다. 초겨울 저녁 어스름이 일찍 내려앉은 인터체인지에 늘어선 휘황찬란한 가로등이 벌판을 밝히고 있었다. 서울~수원행 유신고속에는 멋진 안내양이 따스한 차를 대접했고, 미리 도입한 그레이하운드버스(‘개 그린 버스’라고 불렀다.)는 대륙 간 횡단버스에나 필요한 화장실이 달린 버스가 배차되었다. 간간히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오는 차를 만나는 것은 숫자를 헤아릴 만큼 반가운 일이었다. 그 시절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경제 파탄을 불러올 과잉투자라고 불도저 앞에 드러눕던 야당을 지금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반대라고 하겠지만 그 시절 교통량만으로는 그럴 만도 했겠다.

이제 고속도로는 수시로 고속이 무색해진다. 조금이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수도권을 빠져나가는 일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세월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살게 된 것이다. 신갈저수지도 수변공원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목재 데크 산책로와 호변의 자전거길을 제대로 정비해 놓고 있다. 다만 아직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제대로 된 시설을 못 갖춘 것은 아마도 수원과 용인이 서로 맞물리는 사각지대인 탓이 아닐까 한다.

동탄, 상전벽해가 된 수도권 주택 난민들의 새 둥지

고매리는 수원 시내버스가 하루 몇 차례 드나들던 한적한 시골이었다. 대량으로 계란을 생산하는 양계장의 닭똥 냄새가 진동하던 농촌이었다. 동탄은 벌판 가운데 있는 시골 면소재지였고, 산척저수지와 중리 저수지에 낚시꾼들이나 찾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이제 그 시절을 기억하고는 아파트가 밀림을 이룬 동탄 벌판이 낯설 수밖에 없다. 동탄이 있다면 서탄도 있을 텐데  평택시 서탄면은 탄(炭)자가 다르다. 아마도 서탄은 세마대 너머 황구지천이 해당되지 않을까도 싶다.

 동탄은 하늘 모르는 집값과 전세난을 피해 남진하는 수도권 거주 난민들의 거대한 베드타운으로 시작하여 생산공장이 적절하게 배치된 직주일체형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분당, 평촌, 일산, 중동같은 1기 신도시 이후에 그래도 가장 야심찬 신도시로서 일단 성공적인처럼 보인다. 삼성반도체 공장이 확장되고 수서 발 SRT의 중간역으로, 일산발 GTX의 종점으로 설계된 동탄은 화려하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지하철에 홍합처럼  조불조불 매달린 아파트 군락지와는 확연히 다른 획을 그을 것이다.

 동탄1신도시와 동탄2신도시의 구분은 오산천이 기준점이 되고 경부고속도로와 고속철로망이 다시 한번 동과 서를 가른다. 2기 동탄의 아파트 건설이 한창일 때 타워크레인들이 가을날 고추잠자리들처럼 들판과 구릉에 가득하기도 했다. 이름을 ‘리베라CC’로 바꾼 36홀 짜리 관악컨트리클럽은 박정희 대통령이 참모들과 머리를 식히던 한적한 교외의 숲속이었다. 그 초원과 수림을 아파트들이 에워싸며 최고의 조망이라고 자랑하는 세월이니 상전벽해가 바로 그 말이리라. 신갈저수지의 수문에서 출발하는 오산천의 강둑은 제대로 정비되기에는 시간이 걸릴듯하다. 자전거길도 신도시를 만들면서 우회도로 편으로 내서 동탄의 옛 면소재지 근방인 금반교까지는 그런대로 진행되다가 끊겨버린다. 오산시에 접어드는 약 4km 구간은 자연상태로의 강둑길이 그대로 버려져 있어 비포장길을 덜컹거리며 가야 하지만 나름대로 운치는 살아있다.

오산과 화성은 원래 한 몸

오산시로 접어들자 둔치는 넓어진다. 수변공원에서 느끼는 주민들의 생활 속 편의와 만족도는 그 어떤 복지시설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다. 유모차를 밀면서 한가로이 걷는 엄마, 자전거를 타면서 바람을 만들고, 리틀 야구부의 재롱을 보는 아빠의 흐뭇함이 한눈에 펼쳐지는 장(場)이니 자치단체가 예산을 아낄 이유가 없다. 몇 해 전부터 오산시는 자전거축제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모르면 물어서 간다는 자세도 호감이 간다. 오산시의 자전거는 북으로는 신갈을 지나 탄천으로, 남으로는 진위천, 황구지천, 그리고 멀리 안성천까지 이어질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다. 

도시의 팽창은 경찰서의 팽창과 거의 같은 궤를 유지한다. 사람이 몰려들면서 남기는 나쁜 흔적은 범죄가 일단 눈에 두드러진다. 오산이 화성과 한 몸이던 시절, 1978년 화성경찰서가 문을 열기 전까지 수원경찰서가 수원·오산·화성을 모두 관장했었다. 도시의 몸피가 불어 이제 오산·화성은 오산경찰서, 화성동탄경찰서, 화성서부경찰서로 나누어졌다. 그나마 <살인의 추억>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공포와 악마의 브랜드가 경찰서 하나를 앞당겨 탄생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오산·화성에는 대형공장에서부터 조그만 플라스틱 사출공장까지 마을마다 공장이다. 강둑으로 올라서지 않아도 제지공장의 탑은 높게 솟아 있었고, 강둑길로는 교대시간에 맞춰 분주하게 오가는 근로자들의 발걸음이 쟀다.

진위면에 이른다. 경부철도가 멀찌감치 들판 길을 지나고 멀리 진위역이 보인다. 두 개의 기업에 관한 오래된 기억이다.

‘한국 야쿠르트’, 통학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야쿠르트의 간판, 미국의 원조급식에서 맛본 가루분유 밖에 모르던 시절 야쿠르트는 낯선 이름이었다. 오늘날 유산균이 장에 좋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 되었지만 그 새콤한 맛을 제대로 본 것은 그로부터도 십수 년이 흐른 뒤였다. 요거트가 일용할 양식 수준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도 진보가 있었다는 얘기다.

자전거는 진위천 상류로 방향을 바꾼다. 또 하나의 기억 ‘YKK’다. 여전히 경부철로가 지나는 진위교 옆에 벌써 반세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송탄에서 수원으로 통학하던 내가 매일 만나게 되던 기업의 로고다. YKK는 지퍼의 대명사다. 지퍼를 ‘쟈꾸’라고 부르던 시절, 우리나라의 쟈꾸는 얼마 안 가서 벌어지는 게 기본이었다. 팬티를 안 입은 속살이 급히 올린 쟈꾸에 끼어 실신 일보 직전의 고통까지 경험한 세대에게 부드러운 쟈꾸는 외제를 더 선망하게 만들었다.

YKK가 무슨 약자일까. 어떤 경로로 알았을까. 내 기억 속에 YKK는 주문(呪文)처럼 ‘Yoshida KoKyo Korea’로 남아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희미한 기억의 유래를 알자고 전화를 걸었다. 총무과 여직원이 말했다. Yoshida Kokyo Kabushiki Kaisha(요시다공업주식회사)라고, 일본인 창업자 요시다 선생의 이름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YKK 이름 석 자에도 일본의 장인정신이 살아있고, 100년 기업을 향한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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