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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담- 전철 행상에게 배운다

여강여담- 전철 행상에게 배운다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20.05.2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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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분 안 현물광고, 고객의 급소를 찌르는 상술은 배울만해

전철 반짝 행상, 끈질긴 거래의 힘은 수요와 공급의 접점

조용연 주필

오늘 전철 안에서 기어이 지갑을 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전철 안 행상에게 기꺼이 두 번이나 낚였다. 수원에서 서울 종로까지 가는 동안 3명의 행상은 간격을 계산이나 한 듯이 교체 출연하며 물건을 팔았다. 첫 번째는 벽에다 끈끈이를 붙이는 고리 장사였고 두 번째는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휴대폰 거치대 장사였다. 수시로 전철 안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위법이니 사지도 팔지도 말라고 방송을 해대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기차나 시외버스 안에서 행상은 오랜 역사가 있다. 예전에 버스가 차부(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버스에 올라탄 건장한 청년은 불우한 과거에다 교도소 경력까지를 들먹이며 물건을 팔고, 문신이 시퍼런 팔뚝을 슬쩍 내보이면서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파는 물건도 세월 따라 달라졌다. 그때 기억나는 제품은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필이다. 골판지를 관통하도록 콱 콱 찔러 대 보이며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연필심임을 강조했다. 혓바닥으로 침을 묻혀가며 글씨를 쓰다가 부질없이 부서지는 연필심에 질린 학부모의 마을을 꿰뚫고 있었다.

제한시간 1분, 치밀한 전략·전술의 상술

전철이나 지하철 안은 움직이는 번개 장터다.

e-커머스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이들의 출현에 대개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거나 못 들은 체 눈을 감고 있고, 주요한 고객은 거의 중장년에서 노인들까지다. 

△아무리 길어도 설명은 1분을 넘지 않는다. 제품의 특질을 유려하게 요약해 말한다.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면 ‘시간이 금’이다. △웅얼거리듯 말하는 장사꾼은 대개 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다. 바닥에 ‘짝짝’ 달라붙는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열차 바닥에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면서 입으로 효과음까지 적절하게 구사하며 시청각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덩치가 큰 제품은 곤란하다. 대개가 손바닥 크기를 넘지 않는 상품으로 캐리어 가방 1개 분량에 담아서 기동성을 최대한 확보한다. 단속반이 올 때를 대비해서 언제든 6개의 출입구를 통해 잽싸게 내릴 태세가 되어 있다. 

이날 내가 스스로 낚인 끈끈이 부착 고리나, 휴대폰 거치대처럼 승객들이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느끼거나, 절실한 아이템을 절묘하게 만들어 낸다. 적어도 이점 에서 이 물건을 제조·공급하는 업체의 비상한 머리는 표창감이다. △가격도 2000원이 표준이다. 과거에는 1000원씩 하던 물건이 인플레가 되어서 그렇다. 물건에 따라서 5000원짜리 비옷을 팔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손이 덜 간다. 꼭 사고 보니 속았다 싶어도 그 정도는 크게 상처받는 액수가 아닌 선이라 가볍다. 

중국산이 주종을 이루는 대형 양판점 D사의 물건값도 조금 쓸만하다 싶으면 이제 2~3000원으로 올라서고 있는 형편이다. △계절, 날씨에도 민감하게 아이템을 등판시킨다. 여름에는 쿨토시, 겨울에는 방한용품 등 적절한 수요를 계산한다. △도봉·수락·관악산 등 등산객이 많이 몰리는 구간 지하철 노선에는 관련 용품을 맞춤형으로 내놓기도 한다. △카드나 외상이 불가하니 오로지 현찰박치기다. 아주 쏠쏠한 장사다. △누군가 승객 한 사람이 지갑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사 주면 이제 실눈을 뜨고 안 보는 척하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뜬다. 

일단 신뢰를 얻어 기꺼이 낚여주면서도 연대의식이 생겨 크게 밑질 건 없다고 위안하면서 말이다. 흡사 예전에 서울역 앞이나 모란시장에서 하던 야바위 판에도 바람잡이가 있듯이, 손님이 없는 음식점에 들어가려다 문을 닫고 도로 나오는 심리와 같다. △꼭 중국산 저가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국내산이니 믿어달라고 목청을 돋운다. △ 덤으로 주는 듯 ‘원플러스 원’(1+1)을 강조하면서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그때그때 기념일을 꼭 갖다 붙이는 마케팅을 한다. △‘실 바늘꿰기 보조기’는 주로 경로석이 가까운 데 서서 설명한다. 필수 노안에다 팔 할이 백내장이 온 실버, 그 누가 바늘귀를 통과는 데 애로를 겪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고객이 있는 곳이 장터다. ‘약장사’가 “애들은 가라”고 하는 것은 19금 사설 탓도 있지만 ‘밤이 무섭다’는 것을 알 턱없는 애들이 고객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전철 행상들은 열심히 ‘1인 번개장터’를 열면서 다음 칸으로 건너간다. BTS의 ‘아미 세대’들이 늙어서도 저 상권이 지속될런지 참 궁금하다. 

잡상인이라고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지하철 만물행상’의 치열한 삶에서 또 한 수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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