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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67. 세 가지 보물과 죽음의 길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67. 세 가지 보물과 죽음의 길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0.05.1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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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던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가 발견한 숫자의 법칙입니다. 던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인맥이 넓은 사람도 150명까지만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전 세계 원시 부족들이 평균 150명 안팎의 구성원으로 마을을 이루는 것을 보고 정리한 이론인데요, 많은 사람이 동의하여 법칙이 된 것입니다. 그럴 듯도 합니다. 보통 사람은 휴대폰에 저장하고 사용하는 번호가 100개에서 150개 정도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영업상 필요한 특별한 경우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류에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숫자는 아마도 3인 듯합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늘과 땅과 인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정반합. A와 B가 평행선을 달리면 절충하여 C를 만들어라, 등등. 3과 관련한 보기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보통 승부를 가를 때도 세 판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3을 넘어가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보통 인간은 그렇다.” 이야기를 만들 때도 보통 3부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사람들이 지루해 하지 않을 정도가 3부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으면 4부 5부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노자의 생각도 3입니다. 노자는 늘 ‘도’를 이야기하는데 이런 식입니다.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도는 무위이다, 도는 통나무다, 도는 어린아이와 같다, 도는 황홀하다 등등. 그래서 사람들이 불만이 많아요.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도’가 무엇이냐?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노자 당신이 말하는 도가 몹시 위대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뭣이냐, 같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하면 똑똑하지도 않고 본받을만하지도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허무맹랑하다, 뭐 이런 공격인 셈이죠. 그러자 노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위대하기 때문에 같잖아 보이는 것이다. 소인들이 비웃지 않으면 대인의 도가 아니다.”

마치 장자가 대붕을 이야기할 때 ‘대붕이 구만리 높이 하늘로 올라가 여섯 달이나 날아 남쪽 바다로 간다는 말에 뱁새들이 비웃는다.’고 하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노자는 사람들이 자신이 말하는 도가 허무맹랑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내 도가 너무 크다니까 구체적으로 한번 얘기해 보겠소. 나에겐 보물 3개가 있는데 사랑, 검소함, 앞서지 않음 이 3가지요.”

여기서 노자도 숫자 3의 법칙을 사용하는군요.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약간 부족하고 셋이 되니까 풍성한 느낌입니다. 노자는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도가 드러나는 모습을 3가지로 들려줍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째 사랑입니다. 한자로는 자(慈)를 씁니다. 자는 ‘어머니’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하니 확장하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도가 드러나는 모습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류가 수없이 변주를 해왔으니까 굳이 더 묘사가 필요 없겠군요. 다만 이 자애로운 사랑은 반드시 용기를 동반한다는 것만 덧붙여 두겠습니다.

둘째 검소함입니다. 검소란 쓸 곳을 잘 골라 쓸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글자 검(儉)이 바로 ‘고를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니까요. 적든 많든 잘 골라서 쓰지 않는 걸 사치 또는 낭비라고 합니다. 검소함은 반드시 넉넉함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검소하면 내 삶에도 여유가 생기고 잘 골라서 쓰므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도 넉넉할 수 있지요.

셋째 세상 사람들보다 앞에 서려 하지 않음입니다. 앞장서서 이끌기보다는 뒤를 받쳐준다는 뜻으로 읽어도 되겠군요. 이는 바로 ‘겸손’이라 하겠습니다. 노자는 자주 얘기하지요. 공을 이룬 뒤에는 물러난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루어주고는 기대지 않는다 등등. 앞에 나서려 애쓰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큰 그릇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이어 노자는 무서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 3가지는 보물이기는 하지만 꽉 잡고 잘 보존하지 않으면 오히려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답니다. 늘 우리네 삶이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니까요. 기쁨과 슬픔이 갈마들고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며 즐거움이 끝나면 곧바로 우울해지기도 하니까요.

노자가 말하는 죽음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3가지 보물을 오해하고 그릇되게 사용할 때입니다.

첫째 자애로운 사랑이 없는 용맹함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반드시 용기를 불러오지만 용맹하다고 다 자애로운 것 아니지요. 사랑이 없는 용기는 나와 남을 죽음으로 이끌어간다고 합니다.

둘째 검소하지 않으면서 넉넉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검소가 바탕이 되지 않은 넉넉함이란 ‘빛깔만 화려한 개살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입 베어 물다 얼굴 찡그리며 집어던지는 개살구 꼴이 된다면 얼마나 참혹하겠습니까.

셋째 뒤는 버리고 앞에만 나서려 하는 태도입니다. 되다만 물동이에는 물이 제대로 담길 수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약수를 부어줘도 간직하지 못하고 흘러 가버릴 뿐입니다. 당연히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만 뒤로 밀리게 되겠지요.

노자는 말합니다. 3가지 보물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좀 더 귀한 것은 ‘사랑’이라고. 자애로운 어머니 사랑, 그것은 노자가 말하는 도가 드러나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곡신(谷神)이기도 하고 자연(自然)이기도 하고 물(水)이기도 합니다.

 

<노자 도덕경 67장 : 天下皆謂我道大(천하개위아도대)이지만 似不肖(사불초)라 하는데 夫唯大故(부유대고)로 似不肖(사불초)하나니라. 若肖(약초)면 久矣(구의)라! 其細也夫(기세야부)여! 我有三寶(아유삼보)하여 持而保之(지이보지)하나니 一曰慈(일왈자)요 二曰儉(이왈검)이요  三曰不敢爲天下先(삼왈불감위천하선)이니 慈故能勇(자고능용)하고 儉故能廣(검고능광)하며 不敢爲天下先故能成器長(불감위천하선고능성기장)하나니라. 今(금)은 舍慈且勇(사자차용)하며 舍儉且廣(사검차광)하며 舍後且先(사후차선)하나니 死矣(사의)로다! 夫慈(부자)여! 以戰則勝(이전즉승)하고 以守則固(이수즉고)하나니 天將救之(천장구지)에 以慈衛之(이자위지)하나니라.>

 

세상 사람들이 나의 도에 대해 모두 말하기를 “몹시 크긴 하지만 본받을만하진 않다.”라 하나니 무릇 큰 까닭에 본받을만하지 않은 것이라. 만약 본받을만 했다면 오래되었으리! 그 도가 작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짐이!

 나에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꽉 쥐고 잘 지키고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요, 둘은 검소함이요, 셋은 감히 세상 사람들보다 앞서지 않음이니 사랑하므로 용기 있고 검소하므로 넉넉하며 감히 앞서지 않으므로 큰 그릇 되어 어른이 된다. 지금 세상에는 사랑을 버리고 용기만 있으며 검소함을 버린 채 넉넉하려만 하며 뒤를 버리고 앞에만 서니, 이는 곧 죽음의 길이로다!

 

무릇 사랑이여! 사랑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사랑으로 지키면 반드시 튼튼하나니 하늘도 장차 세상을 구하려 할 때엔 바로 이 사랑으로 보호하고 지켜주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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