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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탄신일·스승의 날 특집-세종대왕의 빛나는 배려의 리더십

세종탄신일·스승의 날 특집-세종대왕의 빛나는 배려의 리더십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20.05.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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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탄신일에 맞춰 정한 ‘스승의 날’, 꽃다발보다 세종정신 숭모를

다른 군왕에 찾기 힘든 ‘역지사지’의 리더십은 세월이 가도 더욱 빛나

조병인-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현 법무부 인권강사

생일을 조용하게 보냈던 군왕

세종탄신 623주년(5월 15일)이 다가오는데 세상이 고요하다. 예년 같으면 여주의 영릉, 서울의 세종마을, 광화문광장 등지에서 기념행사가 열렸을 터인데, 어디서 굴러 들어온 ‘코로나19라’는 뜨내기가 ‘거리두기’로 나라 전체를 냉동시킨 결과일 터이다. 하지만 탄신일을 조용히 넘긴다고 해서 애석해하거나 대왕에게 송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대왕은 생전에 생일을 다른 날보다 도리어 더 차분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대왕이 스물아홉 살 되던 해 생일날 예조에서 군신이 함께 잔치를 베풀기를 청하니, 대왕이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라면 생일에는 다른 날보다 두 배로 슬퍼하며 울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잔치를 열어 즐길 수가 있겠느냐." 하고 허락지 않았다(세종 7년 4월 10일). 생일날은 부모님이 자기를 낳아서 기르느라 고생하신 것을 생각해야지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대왕보다 앞에 왕이었던 태조, 정종, 태종은 거의 매년 본인의 생일날 사면을 단행해 많은 죄수들을 용서해줬지만, 대왕은 32년 동안 34번 사면을 하면서 생일사면을 한 번도 안 했다. 태조는 24번 중 5번, 정종은 9번 중 3번, 태종은 43번 중 9번 생일사면을 하였다. 태조와 정종은 왕비의 생일에도 사면을 하였고, 특히 태조는 왕비가 죽자 제삿날 사면을 하였다.

모두 정통성이 없음을 가리기 위한 선심이었으니, 장남이 아니었던 대왕은 생일을 조용히 보내고 싶어 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즉위하고 14년 만에 처음으로 생일날 정전에서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았고, 이후 18년 동안도 생일하례를 일곱 번만 받았다. 그것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매번 신하들의 등쌀에 떠밀려서.

어쨌거나 대왕탄신일을 조용히 넘기는 것을 부모님 생신행사를 거르게 된 것처럼 죄송해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흩어져야 살고 뭉치면 죽는다.”고 하니, 이제까지 성대하게 치렀던 기념행사는 온라인으로 옮기고, 오프라인에서는 대왕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디지털뉴딜’의 길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대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알아서 동참할 것이다.

뜻 깊은 두 날의 어색한 결합

5월 15일은 또 ‘스승의 날’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사제가 남북의 이산가족처럼 생이별을 당했다가 어렵게 만났으니 감회가 각별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말할 수 없이 간절했을 터이기에 사제의 눈물이 홍수를 이룰까봐 걱정된다. 그런데 품은 지가 오래된 의문이 하나 있다. ‘스승의 날’에서 ‘스승’이 학교의 선생님인지, 세종대왕인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아리송하다. 이해력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나의 혼란은 1965년에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총)가 ‘은사의 날’이던 명칭을 ‘스승의 날’로 바꾸고 날짜도 5월 26일에서 5월 15일로 옮긴 사실을 안 데서 비롯되었다. 취지는 ‘대왕의 정신’을 본받게 하자는 것이었을 터인데, 탁상행정의 박제가 되었다. 원인은 둥근 구멍에 네모난 자루를 박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협의회 사람들이 널리 전파되기를 바랐던 ‘대왕의 정신’은, 대왕이 자신을 가르친 스승들을 섬긴 태도나 방법이 아니라, 대왕이 임금으로서 가졌던 마음가짐과 생각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추정이 옳다면 55년 공생의 비결이 궁금하다. ‘스승의 날’은 마땅히 대왕의 품성과 행적을 배우는 날이어야 맞을 것 같은데, 이제까지는 전혀 다른 궤도를 그려왔기 때문이다. ‘대왕의 정신’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전한 카네이션과 선물이 여러 해 구설수를 타더니, 종당은 계륵이 된 분위기다. 김영란법의 회초리도 한몫을 거든 느낌이다.

그런데 대왕의 마음과 생각을 힘써 배우는 사람들도 ‘스승의 날’이 닭의 갈빗대가 되든지 말든지 무관심한듯하고, 교육 당국과 학교 선생님들은 여전히 ‘스승의 날’을 학생들이 선생님께 ‘꽃 편지 드리는 날’로 여기는 것 같아서 ‘강요된 만남’의 씁쓸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해법일 텐데, 뾰족한 수가 안 보여 그게 문제다. 대왕탄신일은 손 댈 수가 없는 것이니, ‘스승의 날’을 옮기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총대를 메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그대로 둔다면 ‘스승의 날’을 대왕탄신일로 옮긴 취지에 맞춰, 제자들이 준비한 꽃 편지를 쌓아놓고 사제가 함께 대왕의 마음과 행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때가 때니만큼, 말을 꺼낸 김에 대왕이 옥에 갇힌 죄수들의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헤아린 행적을 소개해보겠다. 하나같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백성을 다스린 자취들이다.

 

세종대왕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백성을 다스린 자취“

1450년 2월 1일 대왕이 마침내 54살로 숨을 거두어 조정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부고를 띄우면서 같이 들여보낸「행장(行狀)」에 대왕의 휼형 행적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기 7개월쯤 전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진 가운데도 친히 법적 근거를 찾아내, 잘못을 저질러 가족과 떨어져 힘들게 살고있는 죄수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그 내용 하나하나가 수감생활의 고통을 헤아린 ‘맞춤식 처우’가 촘촘하게 행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례 1. 죄수들을 친 자식처럼 보살폈다

[1]죄수를 불쌍히 여겨 크고 작은 형벌을 애써 삼가도록 관리들을 훈육하고, 비록 한 대의 회초리나 한 대의 곤장일지라도 모두 명나라의 율문을 따랐다. 

[2] 형벌을 함부로 써서 억울한 마음을 품는 백성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지를 전국에 내리고, 그 교지를 감옥과 관청의 벽에 걸어놓고 반복해서 읽고 외우게 하였다. 

[3] 친히 감옥의 도면을 그려서 안팎에 보여 똑같이 집을 짓게 하였으며, 추운 곳과 더운 곳의 건물을 다르게 짓게 하였다. 

[4] 죄수를 완벽하게 구휼하여, 횡액에 걸려 여위거나 병에 걸리는 자가 없게 하였다.

추운 곳과 더운 곳의 옥을 다르게 짓도록 하였다는 말은 ‘맞춤식 처우’를 뜻하는 것이어서 큰 울림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겨울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도권 즉 기호지방의 감옥 설계와, 겨울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은 부산, 진주, 광주, 목포 같은 삼남지방의 옥 설계가 달랐다는 뜻이니, ‘인권제일시대’인 요즘보다도 앞섰던 것이 틀림없다.

사례 2. 여름철에 더위를 식혀주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대왕이 승지들을 불렀다. 삼복에 손으로 물장구를 쳐서 더위를 물리친 경험을 들려주더니, 더위가 닥치면 동이에 물을 담아 옥중에 두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들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하여 더위를 먹지 않게 해주고 싶다며, 과거에 그런 법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승지들이 문헌을 찾아보고 나서, 그런 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래된 책자에 ‘죄수에게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감방을 깨끗이 쓸게 하였다.’고 적힌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아뢰자, 대왕이 집현전에 명하여 그 글을 찾아오게 하더니, 얼마 뒤에 ‘계절별 죄수처우수칙’을 내려주었다.

첫째. 4월부터 8월까지는 옥중에 물동이를 놓아두고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 물을 갈아준다. 둘째.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자원에 따라 열흘에 한 차례씩 몸을 씻게 한다. 셋째.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머리를 감게 해준다. 넷째.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아준다.

사례 3. 죄수들의 가정을 지켜주었다

죄를 저질러 먼 곳에 안치되거나 관노로 붙여진 사람들이 가족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배우자와 미혼인 자식들도 단란하게 모여서 살 수 있게 허락하고, 부모와 혼인한 자식들 간의 자유왕래도 허락하였다.

옥에 갇힌 죄수의 처나 딸들 가운데 여러 해 동안 헤어져 살아온 자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한 곳에 안치하게 하였다. 또, 죄인으로 연좌되어 관청의 노비가 된 사람의 아내와 딸들에게 원하는 곳에서 나라가 정해준 공물을 바치면서 살아가게 해주었다.

옥에 갇힌 죄수들의 어린 자식을 특별히 구휼하게 하였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을 친족에게 맡기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맡기게 하였다. 친족이 없는 아이는 관가에서 거두어 보살피면서 기르게 하고, 지방은 관리들이 잘 보살펴 기르게 하였다. 그런 뒤에 사헌부와 8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혹시라도 아이가 끼니를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는지 철저히 규찰하게 하였다.

※그림은 김윤보, 「형정화첩」,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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