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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둑길-안양천(의왕·군포·안양·광명·서울)②

한국의 강둑길-안양천(의왕·군포·안양·광명·서울)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4.2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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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 산업화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안양천은 의왕 백운산 자락을 출발할 때만 해도 맑은 내 청계(淸溪)다. 백 리도 못 되는 이 짧은 강은 산업화의 시대를 몸으로 지켜내면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불국토(佛國土)의 이름이라 안양(安養)이라 했다는데 검은 시궁창의 속살엔 냄새가 진동했었다. 모두가 살 만해지자 냇물의 빛깔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쓴 덕택에 이제 ‘맑은 물’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친다. 허나 하동(河童)이 뛰어들기는 무리다. 강바닥 ‘물때’까지 걷히기엔 이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안양 ‘77년 물난리’의 기억도 희미해져

안양천이 물줄기를 크게 꺾을 즈음에 안양대교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다리 밑 그늘과 바람에 더디게 가는 여름 한나절을 억지로 떠나보내고 있다. 또 기억 한 토막이다. 안양 토박이들의 머릿속을 결코 떠날 수 없는 사건은 ‘77년 물난리’다. 40년이나 지나도 기억이 생생한, 그야말로 난리였다.

1925년 한반도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는 사흘 동안 한강, 임진강 유역에 650mm라는 기록적 폭우로 가뜩이나 가난한 식민지의 삶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1977년 7월8일 금요일 저녁부터 안양,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악산 남쪽, 광교산 북쪽, 수리산 동쪽의 옴폭한 들판 안양에 하늘 구멍이 뚫렸다. 나중의 기록이지만 저녁 네 시간 반 동안 430mm의 비가 퍼부었다. 숫자는 가물거리나 언론은 평당 몇 양동이의 물을 쏟아부은 셈이라고 놀라워했다.

안양 병목안에 있던 담배촌(수리산 성지성당 근처)은 산사태로 아예 마을이 사라져 버려 12가구 49명이 세상을 떠났다. 통신과 교통은 마비되고, 대농 안양공장의 방직용 원면 제품이 침수되고, ‘한국병유리’공장 용광로가 멈춰버렸다.

서해의 만조에 걸려 안양천 물길이 막히자 하수가 역류하고 맨홀 뚜껑도 열렸다. 서로 의지하며 허리띠를 묶은 채 탁류를 헤치고 퇴근하던 공원들이 맨홀에 빨려 들어가 죽기도 했다. 곳곳에 고압전선에 감전해 죽는 사람(6명)도 속출했다. 루핑집에 세 들어 살던 나는 다음 날 아침 물바다가 된 박달시장 골목을 보고 기겁을 했다.

떠내려 온 문짝 위에 고양이는 살아있고, 물에 뜬 시신이 전주 옆에 걸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물폭탄 이었다. 이때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양대교 북단 교각 상판이 V자로 주저앉았다. 다리 옆을 지나다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 했다. 소방대원들이 로프를 타고 물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살도 거셌다. 다리 위에서 늘어뜨린 로프에 뭔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의 손목이었다. 허리 아래가 진흙더미에 묻힌 시신이 더는 떠내려가지 말라고 인양작업을 위해 우선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해외토픽감이다. 100여 명의 사망자와 서민주택이 500만원하던 시절, 1,000억의 피해를 낸 안양 물난리의 잔인한 기억이다.

안양유원지에 들어선 ‘안양예술공원’

안양대교 언저리에서 삼성천과 삼막천 물이 합해진다.

삼성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골짜기가 오래도록 수도권 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안양유원지다. 오늘날 ‘안양예술공원’이다. 초입의 포도밭은 서울에서도 시내버스만 타면 닿을 수 있어 청춘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두더지를 잡거나, 인형 맞추기 사격장의 코르크 탄이 애간장을 녹이며 돈만 먹어 대던 일도 옛일이다. 들머리에 ‘김중업박물관’이 손짓한다. ‘유유산업’이 있던 자리다. 유유산업하면 몰라도 극장의 막간 광고에 등장하는 활성비타민 <비나폴로>는 남자의 근육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인 김중업의 일생이 이 골짜기에 남게 된 것도 바로 유유산업의 본관 건물을 그가 설계했기 때문이다.

안양예술문화재단이 이 건물과 경내에 잠들어 있던 안양사의 절터를 복원하여 확보하고 다시 김중업을 주인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일제 때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프랑스의 세계적 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지에’에게 사사 받은 한국 현대건축의 스승이다. 김중업을 몰라도 그가 설계한 청계천변의 그 유명한 3.1로 빌딩은 당시 동양 최고층 건물이었다.

그가 꼼꼼한 글씨로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입니다. 인간이 빚어 놓은 엄청난 손짓이며, 또한 귀한 싸인입니다.”라고 쓴 건축에 대한 정의가 가슴을 울린다. 자신이 설계한 건물에 자기의 일생을 들여놓고 떠난 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영생이며, 부활인가. 일부러라도 한국건축사의 한 장(章)과 여백을 둘러보는 일이야말로 백리도 못 되는 안양천 여정에 윤기를 더할 것이다. 

‘남서울역’이 될 뻔한  ‘광명역’

박달동을 지나 ‘충훈부’부터는 자연하천의 모습을 지닌 채 기아대교까지 이어진다.

인구밀도로 봐도 좀 한적한 곳이다. 오랫동안 시민들의 배설물을 처리하거나 둘 데가 마땅찮은 자재들을 적치하는 장소로 버려져 있던 곳이다. 박카스 병을 만들던 동아유리, 알록달록 노루표페인트가 강 건너편 공장의 전부였고, 도시근교형 채소 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의 행렬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기아산업까지 이어졌었다. 당초 남서울역으로 계획된 KTX역을 당시 광명시장은 건축허가를 빌미로 기어이 광명역으로 바꾸도록 관철했다.

지방자치의 자존심이 광명역사의 그 웅장한 철골구조만큼이나 단단했던 셈이다. 광명역 정차 KTX는 관악산 아래에 바위 터널을 뚫어가며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해 강남의 여객수요까지 20분 안에 잡아끌려고 했으나, 수서발 SRT의 개통으로 생각만큼 대박을 터트려주지는 못했다. 

광명시 소하동은 여전히 ‘소하리’라는 이름으로 토박이들에게는 불린다. 길 위에 굴러가는 탈 것의 역사를 제대로 간직한 곳이기에 소하리는 각별하다. 기아산업은 작명에서도 보기 드문 성공작이다.

기아는 영어의 gear를 음역했다는 것이 유력한 기원이지만,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이라 의역해도 무방하다. 기아(起亞)는 기아(飢餓)나 기아(棄兒)를 연상케 해 찝찝하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멋진 이름이다. 삼천리 자전거의 전신이 바로 기아산업의 출발선이다. K-360 삼륜차를 지나 현대자동차그룹의 차남 반열까지 올라섰기에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를 두루 거쳐 고희(古稀)의 연륜을 자랑할 만한 ‘자동차 입국’의 훈장이다.  

가리봉 ‘벌집’시대와 가산디지털단지

시흥대교를 지나간다. 위세 떨치던 시흥의 한 꼭지다.

안양천 강둑을 사이에 두고, 자전거길과 서부간선도로는 서로 쳐다볼 수는 없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다. 서부간선도로의 정체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악명 높다. 언제나 코를 꿴 채 끌려가듯 앞차의 범퍼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자전거의 위력은 그런 길옆에서 한껏 드러난다. 이제 금천구청역으로 바뀐 경부선 옛 시흥역을 지나면 독산동 일대서부터 구로공단이 나타난다. 1977년 ‘수출 한국 1억 달러 돌파’의 산실인 구로공단은 그저 숙명처럼 고향 부모님과 남동생 뒷바라지를 하던 이 땅의 누이들이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눈물겨운 현장이다.

어떡하든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시대에 인권과 노동의 지고한 가치는 뒤로 밀리고 10월 유신과 5공화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구로를 덮었다.

00어패럴 라벨이 붙은 봉제공장의 미싱이 밤낮없이 돌아가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을 눈물 흘리며 읽던 소녀가 소설가로 탄생한 무대도 구로공단이다.

야학이 불을 밝히고, 노동문학이 태어났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의 무대도, 영화 ‘박하사탕’의 영호가 충북선 철교 위에서 “나 돌아갈래!”를 절규하던 목적지도 구로공단이다. 

공중변소 앞에서 아침마다 긴 줄을 서던 가리봉동 벌집과 쪽방촌은 이제 조선족의 거주지로 변모되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1세대의 후손들이 우리에겐 어색한 뚱베이풍(東北風)의 조선족 음식을 내놓고, 이제는 익숙해진, 중독성 강한 양꼬치를 구워대는 연기 속에서 한국과 중국이 다시 만나는 가리봉의 밤 풍경이 펼쳐진다.

이제 구로공단은 한국의 실리콘벨리로 변했다. 이름도 서울디지털단지가 되고, 가리봉이란 가난한 외투를 벗고, ‘가산디지털역’으로 1호선 전철역 이름도 바뀌었다.

어느새 구로역이다.

내 기억 저편에 밀가루 공장 광고판이 유독 떠오른다. ‘부러운표 밀가루’다. 불보살을 연상시키는, 가부좌를 튼 할아버지 상표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CJ 제일제당 영등포공장의 전신인 동립산업은 미국의 차관으로 들여온 소맥과 원당을 정제해서 밀가루와 설탕을 만들고, 건빵도 생산하여 군납했다. 보릿고개에 귀한 식재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의문은 밀가루 광고라면 ‘부드러운’이어야지 어째서 ‘부러운’표 밀가루인가? 못 먹어 부황이 드는 얼굴로 사는 서민은 뽀얀 밀가루가 부럽기도 했겠다.

이제는 근대문화유산이 된 동립산업의 소맥 사일로(silo)는 살만한 시대가 되면서 건너편 강변에 들어선 백구의 향연장, 고척야구장의 은회색 스카이돔과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벌써 염창교 건너 한강이다. 경제는 오래도록 어두웠고, 되는 장사가 없다 해도 휴일 두 바퀴의 외출로 강둑길은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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