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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64. 자연인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64. 자연인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0.04.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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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대부분 좀 보다가 돌린대.”

재미가 있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죠. 7년째 이어오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자연인’이 주인공입니다. 산속 외딴집에 홀로 사는 사람. 대부분 50대, 60대 남자들로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큰 병에 걸렸다거나 큰돈을 잃었거나 힘든 가정사가 있거나, 뭔가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사는 집도 초라합니다. 먹는 것도 단순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나무, 풀, 동물, 물, 바위들과 벗이 되어 지냅니다. 그런데 출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족스럽다’고 말합니다. 얼굴에 웃음이 많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성인은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여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 뭇 사람들이 허물로 여기는 곳으로 돌아간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아주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합니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자연인 중에는 금전에 큰 손해를 본 사람이 꽤 있습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얻기 어려운 재화’가 금전에 해당하는데요, 부를 욕망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 중에서도 으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은 바로 이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욕망한다고 합니다. 부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나요? 바로 가난이죠. 성인은 부보다는 가난을 욕망한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군요. 그런데 자연인들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자연인들 집이며 음식이며 옷가지를 보면 참 가난해 보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그런 가난을 원해서 몇 년씩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발적 가난’이라고나 할까요.

또 노자의 말을 보면 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 사람들이 ‘허물로 여기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 말도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자연인들에게 어울립니다.

자연인은 산속에 살면서 약초며 나무며 물에 사는 생물이며 작은 텃밭에 곡식을 기릅니다.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말이죠. 이 배움은 현대사회에서 부유하고 귀한 지위를 얻기 위한 배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인은 아주 희열을 느끼며 배우는 모습이 나옵니다.

‘허물로 여기는 곳’도 그렇습니다. 산속 외딴곳은 현대인이 원하는 장소가 아닌 것이죠. 전기도 없어 현대 과학기술이 이루어낸 편리한 문명을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그 사람은 쉽게 결행하지 못합니다. 아마 출연하는 자연인들처럼 커다란 아픔을 겪으면 결행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자연인보다 훨씬 큰 아픔을 겪고도 자연인처럼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지요.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할 때 지키기 쉽고, 아직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도모하기 쉬우며, 무를 때 녹이기 쉽고, 미미할 때 흩어버리기 쉽다.”

자연인들 중에도 노자처럼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큰 아픔을 겪기 전에 미리 이렇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후회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무를 때 녹이기 쉽지만 차일피일하다가 단단해진 뒤에야 힘들게 녹이려고 애를 씁니다. 충치가 조짐을 보이기 전에 미리미리 치아 관리를 잘해두면 고생을 하지 않을 테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노자가 진단한 것처럼 우리는 ‘늘 거의 완성되었을 때 실패’하는 삶도 비슷합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끝이 보일 무렵 성급해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연인들은 그래도 좀 더 빨리 대비하고 성급함을 느긋하게 바꾼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기서 멈추자. 멈춰서 삶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하고 걸음을 멈추고 처음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죠. 그런 그들의 삶이 채널을 돌리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자 도덕경 64장 : 其安易持(기안이지)하고 其未兆易謀(기미조이모)하며 其脆易泮(기취이반)하고 其微易散(기미이산)하니 爲之於未有(위지어미유)하고 治之於未亂(치지어미란)하라. 合抱之木(합포지목)도 生於毫末(생어호말)하고 九層之臺(구층지대)도 起於累土(기어누토)하며

千里之行(천리지행)도 始於足下(시어족하)하나니 爲者敗之(위자패지)하고 執者失之(집자실지)하나니라. 是以聖人(시이성인)은 無爲故無敗(무위고무패)하고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하니라.

民之從事(민지종사)는 常於幾成而敗之(상어기성이패지)하나니 愼終如始(신종여시)하면 則無敗事(즉무패사)하리라. 是以聖人(시이성인)은 欲不欲(욕불욕)하여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하며 學不學(학불학)하여 復衆人之所過(복중인지소과)하나니 輔萬物之自然(보만물지자연)하고 而不敢爲(이불감위)하나니라.>

 

평안할 때 지키기 쉽고 아직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도모하기 쉬우며 무를 때 녹이기 쉽고 미미할 때 흩어버리기 쉬우니,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때 대비를 하고 혼란스럽지 않을 때 다스려두라.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생겨나고 구층 높은 누각도 한 줌 흙에서 일어나며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하나니, 억지로 하려는 자는 실패하고 고집스레 잡으면 잃게 된다. 이리하여 성인은 억지로 하지 않아 실패함이 없고 고집스레 잡지 않아 잃음이 없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거의 이루어졌을 때 늘 실패하나니, 끝냄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으리라. 이리하여 성인은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여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 뭇 사람들이 허물로 여기는 곳으로 돌아가나니,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도울 뿐 감히 억지로 뭔가를 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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