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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둑길-안양천(의왕·군포·안양·광명·서울)①

한국의 강둑길-안양천(의왕·군포·안양·광명·서울)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4.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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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 산업화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안양천은 의왕 백운산 자락을 출발할 때만 해도 맑은 내 청계(淸溪)다. 백 리도 못 되는 이 짧은 강은 산업화의 시대를 몸으로 지켜내면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불국토(佛國土)의 이름이라 안양(安養)이라 했다는데 검은 시궁창의 속살엔 냄새가 진동했었다. 모두가 살 만해지자 냇물의 빛깔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쓴 덕택에 이제 ‘맑은 물’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친다. 허나 하동(河童)이 뛰어들기는 무리다. 강바닥 ‘물때’까지 걷히기엔 이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안양천, 첫 물길 찾기도 어렵다 

안양천의 최장발원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다.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陵幸)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조대왕이 발걸음을 차마 떼어놓을 수 없어 지체했다는 효심의 언덕이다. 광교산에서 수리산 방향 능선 반대편에는 황구지천이 시발한다. 자연부락으로 보면 ‘골사그네’ 마을에서 안양천 따라가기를 시작하지만 백 리도 못 되는 짧은 냇물이다.

1번 국도가 갈라놓고, 의왕IC가 길을 헷갈리게 만들어 냇물은 초입을 찾기도 어렵다. 물가 식물류가 기세등등하여 물은 보이지도 않지만 자전거길은 희미한 싱글 트랙이다. 피리를 만들지도 못할 정도로 가는 대나무 숲을 조성해 을씨년스런 주변을 차단한 의왕시의 노력은 가상하다.

조랑조랑 붙어 있는 다리는 몇백 미터 간격을 띄워 열병(閱兵) 자세로 서 있다.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1번국도 변엔 ‘포도원사거리’라는 이름만이 이 자리가 한때 포도밭이었음을 증명한다. “수원 하면 딸기였고, 안양 하면 포도였던 시절”이 있었다. 도로가 우리네 삶의 공간과 시간의 이격을 좁힐수록 포도와 딸기는 원심력 방향으로 멀어져 자리를 잡았다.

1997년 외환위기 전에는 ‘경안운하계획’이라는 것도 있었다. 한강↔ 안양천↔반월천↔시화호↔대부도를 잇는 물길 계획이었다. 지금이야 운하의 ‘운’자만 들어도 기겁을 하는 형국이니 말도 꺼내기 어렵겠지만 사실 군포시 당정동에서 대야미동 쪽으로 물길만 터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계획이었다.

=산업화의 살아있는 박물관, 안양천변 공장들

안양천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던 공장의 이름은 이 나라 산업화의 이정표가 된 기업의 명패였다. ‘고려합섬’, ‘유한양행’, ‘농심’, ‘금성전선’, ‘동양나이론’, ‘한국제지, 삼덕제지’, ‘유유산업’, ‘금성방직’, ‘노루표 페인트’, ‘동아유리’ 등등 가리봉동 일대 구로공단까지 이르면 이 나라 경공업의 완결편을 이룬다. 더러는 떠나거나,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팽창하는 서울을 따라 공장도 안양의 포도밭을 점령하면서 남진한 결과다. 공장의 진화에서 보폭을 따라가지 못한 축은 아직도 눈치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면서도 냇가에 스크럼을 짜고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안양천은 초기 산업화의 무대답게 오염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폐수의 침전이 유백색 물길 속에서 수초처럼 흔들렸었다.  이 오염을 한 시인은 이렇게 한탄하면서도 생태문학으로 분류되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그렸다.

빨갛게 충혈된 ppm의 경고등 아래/ 스모그의 안개가 육교를 지우고/
다리 건너 마을 숲을 지울 때면/ 심한 구토증세를 일으키며/ 안양천은 몸 져 눕는다./
(중략) 정체불명의 검은 옷자락을 찢고/ 기억의 저편에서 일어서는 빌딩/
아침 태양빛을 가르며(중략)/ 어디서 날아 왔을까/ 황조롱이 찌르러기 떼가 물속을 쪼고 있다
<여명옥의 ‘안양천’ 중에서>

이제 안양천은 돌고기, 모래무지, 몰개, 버들치가 살고, 쇠오리, 흰목물떼새, 넓적부리, 원앙이 헤엄치는 물이 되었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검은 강물에 대한 반성으로 ‘안양천살리기 10개년 종합계획’에 모두가 힘을 모은 결과다.

=‘시흥군 안양읍’ 시절이 그립다

자칫 머리를 부딪힐 듯싶어 다리 아래를 허리 굽혀 지나가야 하는 곳도 여러 군데다. 덕천교에 이르면 청계산과 백운산 서북사면 물을 데려오는 학의천이 합류한다. 관악산과 삼성산을 중심으로 하트모양을 그리면서 안양천과 한강, 양재천과 학의천을 잇는 환상(環狀)자전거코스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내가 안양으로 이주한 196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본다. 시흥군 안양읍 시절이다. 안양이 자라는 터는 시흥이 내몰린 터다. 지금의 박달동도 시흥군 서면 박달리에서 편입한 것이다. 

1981년 광명시가 시흥군 서면에서 떨어져 나간다. 금천구는 시흥이라는 이름만 껴안고 서울시민의 자리를 지킨다. 옛날부터 시흥을 알거나 조금만 지리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시흥시에 시흥이 없다”는 것에 의아해할 것이다. 1988년까지 시흥군청이 안양에 더부살이를 하긴 했었지만 1973년에 시로 승격한 노른자위 안양과 문패를 갈아 단 광명이 빠진 시흥군은 외곽 산쪽으로 붙은 과천면, 의왕읍, 군포읍만 남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그 형세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파키스탄)으로 갈라진 것과 흡사하다고 했을까. 잘나가던 때의 시흥군은 북으로는 영등포읍과 동작구 일대인 북면, 서울대 와 금천구 일대인 동면, 광명시 일대인 서면, 군포시 일대의 남면, 안산시가 된 반월출장소까지 관할했다. 안양시가 된 서이면, 의왕면, 과천면은 물론 서울교대가 있는 서초구 일부까지 신동면이었으니 넓기도 넓었다. 사실 지금의 시흥시는 억지로 이름을 붙잡다 보니 인천 앞바다의 짠물이 드나드는 소래 일대를 시흥이라고 고집하게 된 어색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서울의 위성도시이면서도 서울에 너무 가까워 특급열차도  서지 않는 안양을 토박이 김대규 시인은 애달파 했을까. 고향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 객차를 /타고 오렴

 

=그야말로 상전벽해,  평촌 신도시

학의천이 관통하는 동안양의 벌판은 이름마저 ‘평촌들’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단지와 안양의 신도시로서 중심역할을 하지만 멀리 귀인동 자연부락을 빼면 꽤나 넓은 들판이었다.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을 잡기 위해서 1989년 분당·평촌·산본·중동 4대 신도시 개발이 선포되자, 밀려나는 토박이들의 시위는 심지어 ‘똥장군’까지 동원한 결사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때 동원되었던 시위방어(진압이라고 결코 할 수 없는)에서 경찰기동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화염병이나 돌이 아니었다. 성난 농민들이 얇은 비닐에 인분을 넣어 주둥이를 대강 막고 던져대는 무기, 이른바 ‘똥탄’이었다. 발효가 제대로 된, 이 신병기의 역습에 피폭된 대원들은 혼비백산했다. 땀과 범벅이 된 대나무 소재의 방석복 위에 터진 화학탄(?)의 위력 때문에 버스에 오를 수가 없었다. 화염병보다 무서운 ‘똥탄과의 전쟁’ 속에 신도시는 번듯한 모습으로 구획정리를 했고, 노태우 정권의 최대 과제이자 치적인 집값은 고삐가 잡혔다.

국도 1번과 나란히 삼막천과 삼성천 물길이 내려온다. 정조의 능행 참배라는 효심이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이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38호)다. 능행에 만드는 다리는 행차 때마다 임시다리(舟橋)를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동원된 백성의 신역이 보통 고된 것이 아니어서 아예 돌다리로 영구히 놓아 이름도 ‘만백성이 편안하라’고 만안교(萬安橋)라 붙인 것이다. 1980년 국도 확장으로 옛 위치에서 뒤로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무지개 모양 홍예(虹霓)양식 석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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