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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62. 흙밥과 길밥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62. 흙밥과 길밥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0.03.3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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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흙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흙에서 밥이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죠. 흙은 마치 화수분과 같아서 생명을 기르는 요소들이 끝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쓰는 ‘흙밥’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흙수저를 든 아이들이 먹는 밥을 흙밥이라고 부르거든요.

흙수저의 상대편에는 금수저가 있습니다. 금은 흙 속에 묻힌 아주 귀한 보물이죠. 그러니까 특별한 겁니다. 금수저를 든 아이들이 먹는 밥은 ‘금밥’이라고 부를까요? 아닙니다. 요즘은 ‘길밥’이라고 부릅니다. 길밥이란 말 그대로 길에서 먹는 밥을 말합니다.

흙밥과 길밥은 밥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삼각김밥, 햄버거, 닭꼬치, 불닭복음면, 컵밥 등. 대부분 인스턴트식품으로 빠르게 조리하여 허겁지겁 먹어치울 수 있는 음식들입니다. 차분하게 앉아서 먹을 수도 없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또는 길을 걸으며 먹기도 합니다. 채소나 과일, 좋은 육류 등 균형 잡힌 식사와는 아주 거리가 먼 밥입니다.

흙밥은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먹지만 길밥은 충분히 부유한 집 아이들이 먹습니다. 얼마든지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금수저 집 아이들도 길밥을 먹습니다. 식단이 평등하긴 한데, 뭔가 짠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흙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계층이 많은 사회구조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이 길밥을 먹도록 내모는 사회시스템도 똑같이 문제입니다. 흙밥은 사회가 생산한 부를 고르게 나누지 않는 것이 원인이라면, 길밥은 사회가 생산한 부를 나만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이 원인입니다. 어른들은 이 잘못된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어 아이들에게 흙밥과 길밥을 먹이는 겁니다. 영양 불균형 상태로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과연 어떤 상태가 될까요?

 

노자는 말합니다.

“천하를 경영하려고 삼공을 둘 때, 사람들은 좋은 보물을 가슴에 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빨리 달려든다.”

한 무리가 천하를 제패하고 나면 높은 벼슬아치를 세우게 됩니다. 노자가 말하는 삼공은 바로 한 나라가 가진 부와 권력을 가지는 벼슬아치들을 말합니다. 그 자리에 서로 앉으려고 다투게 되는 모습을 노자는 ‘좋은 보물을 가슴에 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빨리 달려든다.’고 표현합니다. 좋은 보물이란 자리를 주는 최고 권력자에게 바칠 물건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재벌가에 태어나기, 학벌 만들기,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돈 모으기 같은 것들이라고 할까요?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는 몹시 빠릅니다. 그 수레보다 빨리 달려야 된다고 하는데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자리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아이들을 길밥으로 내모는 것도 조금 이해가 됩니다. 남보다 좀 더 많이 공부해서 좋은 학벌을 얻고 돈과 지위를 차지하려면 빨리빨리 학원들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어디 밥 따위를 먹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서서 후루룩, 걸으며 우걱우걱 먹어 치워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이 도’를 길러 나아감만 못하다.”

길밥을 먹으며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빨리 달리려 드는 것보다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도를 기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이 도’란 무엇일까요? ‘만물의 깊숙한 아랫목’이라고 하는군요. 깊숙한 아랫목이 가진 덕은 늘 그러함, 고요함, 아래로 흐름 등과 같은 뜻입니다.

길밥을 먹으며 들고 뛰는 것보다 앉아서 고요히 머물고, 남보다 윗자리에 서려고 귀한 보물을 바치며 아첨하기보단 자꾸 아래로만 흘러 점점 더 낮은 자리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이 어쩌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럴 수 있다면 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죠.

만약 그런 도를 가질 수만 있다면 ‘애써 말하지 않아도 구하는 것을 얻고 죄가 있어도 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이가 이 도를 추구한다면 아마도 흙밥이니 길밥이니 하는 말들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낱 꿈일까요?

 

<노자 도덕경 62장 : 道者(도자)는 萬物之奧(만물지오)이니 善人之寶(선인지보)요 不善人之所保(불선인지소보)라. 美言(미언)은 可以市(가이시)하며 尊行(존행)은 可以加人(가이가인)이니 人之不善(인지불선)을 何棄之有(하기지유)리오? 故立天下(고립천하)하고 置三公(치삼공)에

雖有拱壁以先駟馬(수유공벽이선사마)도 不如坐進此道(불여좌진차도)하나니라. 古之所以貴此道者何(고지소이귀차도자하)인가? 不曰以求得(불왈이구득)하고 有罪以免邪(유죄이면사)하니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하니라.>

 

도라는 건 만물의 깊숙한 아랫목이니 선인의 보물이요 불선인의 보호막이라. 아름다운 말은 값이 높고 존경스런 행위는 다른 이에게 은혜가 더해지니, 사람이 불선하다 하여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경영하려고 삼공을 둘 때, 좋은 보물을 가슴에 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빨리 달려들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이 도’를 길러 나아감만 못하다. 예전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인가? 애써 말하지 않아도 구하는 것을 얻고 죄가 있어도 면할 수 있어 그러하니, 바로 천하의 귀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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