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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경안천(용인·광주)①

한국의 강-경안천(용인·광주)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3.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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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천, 사라져가는 이름 김량과 경안을 지켜보다

광주산맥이 기를 다해 주저앉는 어간에서 경안천은 출발한다. 와우정사에 드러누운 부처님이나, 물줄기의 정수리에  눌러 앉은 문수보살이나 해실 골짜기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세월이 가다보니 인구 100만을 넘긴 용인이나, 서울의 동남쪽 관문, 땅금 비싼 광주(廣州)나 어여쁘고 오래된 이름 김량(金良)과 경안(京安)을 잃어버리긴 매한가지다. 오염의 강을 털고 이제 수도권의 물 창고 팔당댐으로 가는 물 한 바가지라도 더 보태는 경안천, 이 겨울 강물이 얼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습원에 철새가 분주하다.

태국 스님도 추위 피해 떠난 와우정사

한겨울의 골짜기가 춥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곱등고개 아래는 장갑을 끼고 자전거를 잡은 손이 시렸다. 광주산맥이 맥이 빠질 때쯤 문수봉이 솟아 있고, 바래산이 골짜기를 만든 해실리 골짜기에서 경안천은 시작된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북으로 치솟아 오른 산줄기들이 용인·수원·광주의 올망졸망한 산들을 만드는 분기점에 용인이 있다. 수원보다 어림해도 80m가 높아 용인엔 겨울이 오래 머물다 간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겠다. 지대가 높으니 당연히 분수령이다. 산 너머 양지에선 동으로 복하천이, 남으로는 청미천이 길을 떠난다. 동백에서 오산천이, 이동에서 진위천이, 수지에서 탄천이 용인을 서둘러 벗어나니 온전히 용인을 훑고 가는 강은 경안천뿐 이다.

자전거를 흔쾌히 끌고 나와 동행해준 친구가 고맙다. 그의 완주에 방해될까봐 산모퉁이 하나 돌면 만나는 와우정사도 못 들린다.

와우정사는 보통 절이 아니다.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 열반종의 본산이다. 1970년에 실향민인 해암해곡 삼장법사 김해근이 중흥하였다. 절에서 만나는 어마어마한 부처님 좌상은 물론, 인도에서 모셔와 법당에 드러누워 계신 향나무 부처님은 목불로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세계 140개 나라와 교류하고 있는 불구(佛具)를 비롯한 징표는 박물관을 차려도 될 어마어마한 양이다. 태국의 관광객에겐 빼놓을 수 없는 성지다. 몇 해 전 겨울, 마당을 쓸던 주지 해월스님은 말했다. “지금은 동남아에서 수행하러 온 스님들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지. 봄이 되면 다시 올 거구먼. 추워서 못 견뎌...” 스님이 오래전 인기 있던 연속방송극 ‘김삿갓북한방랑기’의 작가였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추운데도 할아버지들의 자전거는 강둑길을 찾는다. 그저 도랑에 불과한 강의 들머리 양옆에 자전거전용로를 만든 걸 보면 용인시가 그래도 곳간이 넉넉해서 이리라.

100만 도시 용인, 김량장이 그립다

페달질이 익을 때쯤 용인 시내에 들어선다. 여전히 경안천은 조그만 냇가다. 둔치는 공들여 만든 조형물이 심심찮다. GS수퍼마켓자리가 옛 김량장역 터다. 김량장은 경전철역으로 살아났으나 사어(死語)에 가까운 이름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김령역참’이 있었고, ‘김령장’이 있었다 하니 김량이라는 사람이 처음 장(場)을 세웠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수원에서 출발하여 여주로 가던 수여선 협궤열차는 지금의 동백동이 있는 어정역을 지나 힘겹게 큰메주고개를 넘어 삼가역에서 한숨 돌리고는 ‘김량장역’에 들어왔었다. 바로 100여 미터 앞을 애물단지 용인경전철이 지나간다. 2017년 5월 의정부 경전철 민자사업에 ‘파산’이라고 선고 되었다. 의정부시는 7,785억원의 배상금을 갚느라 5,153억원을 빚을 내서(지방채 발행) 떠안은 용인경전철이 택한 방식으로 또 빚을 내서 경전철을 인수하여 계속 굴러가게 할 것이라 했다. 

자치단체가 황금알을 낳을 거라며 열병처럼 번지던 경전철 건설의 열풍에 달려들어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그나마 2019년 누적탑승자 5천만 명 돌파했다고 홍보하고 있으니 이용자가 늘어 적자폭이 줄어들기를 바랄뿐이다. 차라리 철도청이 수여선 철도부지라도 팔아먹지 말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면 수원역에서 에버랜드까지는 멸종된 협궤열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는 관광명물이라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한때 경안천을 죽은 강으로 만들었던 오염의 주범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공장들이었다.   주민들의 인식부족도 한몫했으나 이내 잘못을 깨달았다. 이제 용인은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선 지 몇 해가 흘렀다. 시청 청사를 호화롭게 지었다고 난리를 치던 언론과 시민들도 시민공간으로 상당 부분 개방한 탓에 불만이 쑥 들어갔다. 성남시도 따라서 지었고, 나머지 자치단체들도 부담을 조금은 던 듯 보인다. 역대 용인시장들은 줄줄이 불명예제대(?)를 했고, 경력만 보고 기꺼이 찍어준 나 같은 사람들은 꼴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우울해지니 시시껄렁한 얘기나 하나 할까. 동네 이름이다. 용인시 유방동, 옛 용인읍 유방리, 지금 영동고속도로 용인IC가 있는 동네다. 지금 지나가는 곳이다. 버드나무 숲 유림(柳林)리와 방축(坊築)리가 합성된 이름이라 해도 ‘유방’의 풍만은 둥글게 솟아올라 눈앞을 어지럽힌다. 유림동으로 덮어보려 하지만 참 희한하게도 에로틱한 이미지의 지명들은 숨이 질기다. 유방교에 흔적이 남아있다. 동네 이름 개명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을 주민들이 서둘러 바꾸려 들지는 않는다. 예천 지보면이 그렇고, 파주 발랑동이 그렇다. 한자의 뜻까지 갈 것도 없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 여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건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니까.

마침 용인시는 ‘태교도시 용인’을 사업으로 내 걸었다. 세계최초라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유방동의 역할을 살려야 할 명분은 더욱 뚜렷해진다. 모유 수유 운동까지 해야 할 참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다. 그러나 ‘태교’를 도시 용인의 아이템으로 잡은 상상력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조 후기 용인에서 태어나 용인에 묻힌 한 여인 ‘이 사주당’(1739-1821)이 쓴 한 권의 책 <태교신기>에서 비롯된다. 사임당 신씨 식으로 좀 거룩하게 말해서 사주당 이씨는 여성이 아무래도 제 위치 찾기 어렵던 시대에 군자처럼 지식인으로 학문을 하면서도, 부모봉양, 자식건사, 남편 내조까지를 두루 잘한 ‘슈퍼 우먼’이다. 실존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위에 산업으로까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지자체를 더 돋보이게 한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난 ‘생거(生居)용인’이다. 설마 전임자 ‘흔적지우기’로 시들한 기운이 이미 드리운 건 아니겠지.

둔전역을 지나면 갈대를 심어놓은 둔치길이 자전거와 숨바꼭질을 한다.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심심하면 한 대씩 지나가는 경전철도 에버랜드역으로 가려고 강을 건넌다. 

자연농원이 촌스러워 ‘에버랜드’로 바꾼 것은 시대가 그렇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포곡면 땅 1/3에 들어선 450만 평 땅이 자연농원이다. 산비알 마다 밤나무를 심은 호암 이병철 회장이 에버랜드가 한류의 성지가 되리라고 생각이야 했겠는가마는 그 혜안은 경탄할만하다. 포곡은 경안천에 창포가 워낙 많이 자라서 포곡(蒲谷)이라 했다는 설과, 경안천이 면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기에 포곡(浦谷)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지금이야 어디 창포가 있으랴.

포곡을 지나면서 강폭을 조금씩 늘려 가지만 강둑길은 어설프게 끊어지다 이어진다. 강둑이 이어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비로소 강물과 하나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둘러 가면 강물은 저만치 혼자 가 버리고 만다. 강물이 무정한 게 아니라 사람의 유정(有情)을 방해한 무정(無情) 탓이다. 갈담리 응검들 마을은 온통 동네가 공장으로 뒤죽박죽이다. 설계된 공단이 아니라 공터라고 생긴 곳에는 하물며 창고라도 구겨 넣어서 골목길이 숨바꼭질한다. ‘자연부락공단’이란 신조어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수지구 상현동의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연결된 아파트 단지를 닮았다. 행정이 현실을 뒤따라도 못가 생겨난 부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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