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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양구서천(양구)②

한국의 강-양구서천(양구)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2.2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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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정중앙을 흐르는 꼬마 강, 양구서천

국가하천의 서열로 말하면 양구서천은 거의 꼬래비에 서야 한다. 38선보다 훨씬 북쪽의 강이라 비무장지대까지 물줄기가 닿아 있다. 
그 이름도 경쾌한 팔랑폭포에서 호적에 오르지만 지방하천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양구읍에 와서야 국가하천으로 승진한다.
 ‘청춘 양구’,‘배꼽 양구’의 한가운데를 촉촉이 적셔주는 물이다. 한반도 섬을 만든 인공습지를 지날 때면 물길이 느려지다가 파로호로 환승할 때는 아예 허리춤을 풀어 놓는다. 
북한강을 불려준다는 보람과 한반도의 정중앙을 흐른다는 자부심마저 없다면 이 막둥이 강은 도통 살맛이 나지 않을 게 틀림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린 박수근, 그를 말하는 양구

정림교에서 나직한 언덕으로 올라가서 만나는 ‘박수근 미술관’은 양구 사람들에게 자랑이다. 박수근은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알고 있으리만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다. 양구읍 정림리 태생이다.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라는 표현에 그의 전부가 들어 있다.

박수근 미술관은 고압적이지 않아 좋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암실로 들어간다. 거기 51살에 술 없이 살아가기 힘들었던 세상을 떠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삶이 축약되어 돌아간다. 미술관을 설렁설렁 돌아보기엔 그가 너무 소중한 존재다. 미리 들여다본 그의 일대기가 빛바랜 육필 속에, 그의 붓끝에서 화강암의 질감으로 다시 살아난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 금성에서 시집온 그의 아내 김복순의 일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 좋은 혼처를 마다하고 가난하지만 선한 눈매에 이끌려 혼인한 화가 아내의 삶이 거기 있다. 그림을 내다 팔아 35만 환으로 마련한 서울 창신동 집,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낙은 그의 아내였다.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화가가 일제 강점기 때 선전(鮮展)에 8차례나 입선했다는 이력은 그의 천재성을 말해 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 미8군 PX에서 그림을 그려 입에 풀칠하는 그가 박완서의 ‘나목’에 등장하는 것도 시대가 만든 예술가의 아픈 삶 그 한 조각이다.

그가 쓴 이력서의 한자들은 한 줄 한 줄 걸어 나와 정갈하게 산 시간 앞에 조용히 포개진다.   그것 마저도 예술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이장해온 박수근 부부의 묘소는 생가 뒤편 언덕에서 미술관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죽어서라도 얼마나 행복한가. 그의 아내가 “가난했어도 평생 행복했다.”고 말하는 일기를 남긴 것만으로도 인간 박수근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군인의 도시답게 멀리서 면회 온 부모들과 병사들이 함께 정담을 나누며 그림을 감상하는 풍경은 다른 소읍(小邑)이 흉내 내기 힘든, 또 다른 그림이다.

청춘의 CI, 힘은 넘치지만 어쩐지 모식적

하리교를 지나 자전거 길은 파로호 권역으로 접어든다. ‘청춘공원’이다. 여기서 북한강까지는 13.5km라는 국가하천 이정표를 달고 있지만 전부 자전거길이라고 생각하면 실망한다. 한반도 모형의 습지를 만들고, 짚라인을 설치하여 신나는 청춘들의 놀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호리병목에다 수중보를 설치해서 물을 일단 가두어야 한반도가 물에 둥둥 뜨게 된다. 자전거 길은 그렇게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설계로 포장을 다 마쳤다.

지자체들이 저마다 한반도의 닮은꼴이라 주장하고, 영월은 면(面)의 이름표를 ‘한반도면’이라 잽싸게 바꿔 달기도 했다. 거기 비하면 아예 한반도를 물 한가운데에 만들어버린 발상도 청춘답다. 전망대에서 짚라인을 타고 한반도에 내려앉는 그 짜릿한 즐거움이 그저 유희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파로호 수면으로 쏟아져 내리는 순간에도 푸르른 이 산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이 땅의 청춘이다.

6·25 전쟁 시, 화천전투에서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시켜 ‘파로호(破虜湖)’라 이름 지은 분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며 중국이 거북하게 생각한다고 ‘대붕호(大鵬湖)’로 개명해야 한다는 계획이 추진되다가 ‘6.25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사대 근성에서 생겨난 발상이라는 반발에 부딪혀 물아래로 잠복한 형편이다. 수상한 세월이지만 인터넷에 “이승만이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 어리석은 청춘들이 더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오후 2시를 지나가는 여름 해는 이 강원도 산골짜기라고 예외가 없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이내 소금기로 말라 버렸다. 수몰되어 가물 때만 갈비살을 드러내는 옛 다리 세월교에서 주저앉았다. 더 이상 북한강 합류점까지 나아갈 수도 없다. 북에서 발원하여 상무룡리에서 파로호 대열에 합류하는 수입천도 강둑길은 없다. 군량리 초입을 종점으로 잡는다.

자전거를 돌려 올라오는 길, 숨이 턱까지 찬다. 짧은 강, 막내쯤 된다고 얕보았다가 혼나는 꼴이다.

청춘들의 힐링 공간이라고 설명하는 그 ‘청춘공원’의 깊숙한 끝에 ‘양구인문박물관’이 있다. 원래 이름은 ‘이해인시문학관’과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이었다. 1,2층에 있는 공간들이 최근 이름을 바꾸었다.

이해인 시인의 이름은 이제 입구의 표지석만 있을 뿐 그의 이름도 시(詩)도 거두어졌다. 수녀라는 신분 때문이었을까, 상업주의에 이용되는 시인의 순수가 안타까워 거둬진 것일까.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이해인시문학관’을 세우자는 부산의 한 언론인의 주창까지 있는걸 보면 이해인이란 이름 석 자가 이 시대의 청량제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해인 시 문학관이 동수리에 들어선 것도 시인 바로 이 동네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텐데 아쉽다. 그 자리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10인을 만나다’ 전이 열리고 있다. 시인의 자리에 다른 문학의 장르를 넣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10명의 시인이 함께 소개되다가 보니 백화점식으로 진열한 느낌이다. 자칫하다가는 찢어진 ‘백과사전’처럼 수박 겉핥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왕 이해인 시인이 떠나간 자리라면 양구라는 특성이 더욱 빛을 발하도록 전쟁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나 전쟁 속에 피어난 시가 자리한다면 더욱 의미 있는 구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학자 두 분, 김형석과 안병욱 선생,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김형석 선생이 ‘한국사회 무엇이 달라져야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100세의 고령에도 이 시대를 위한 충고를 진지하게 하고 계신 열정이 존경스럽다. 북에 고향을 두고 있는 두 철학자의 일생을 이렇게 북에 가까운 소읍 양구에서 모셔올 수 있는 기획은 훌륭하다. 세상을 보는 눈, 인생, 사랑, 독서까지 생활이 곧 철학이신 양대 거두의 철학적 뒷받침은 청춘양구가 부박하게 흘러가지 않을 수 있는 중심추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책을 읽지 않는 세대, 사색을 골치 아파하는 청춘, 설마 ‘철학의 집’을 ‘철학관’과 혼동이야 하겠는가만 여기 만들어진 어둠의 공간에서 노철학자들이 일러주는 ‘인생의 훈화’를 가슴에 새겨보는 게 좋겠다. 암실에서 인화하는 흑백필름이 화학처리를 거쳐 감광지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이제 우리 세대는 잃어버렸다. 밤새워 흑백의 파인더 속 소묘에 매달리다 맞게 된, 동트는 아침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컬러필름 현상소인 디피점이 빼앗아갔고,  그 마저도 디지털카메라 메모리가 차지하고 말았다.

“숨이 차서 흉내도 못 낼 랩 가사의 입놀림으로 세상을 말하지 말라”고 인생 선배들은 충고하고 있다. ‘청춘양구’곁에 두 분 노철학자의 서재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어르신들의 정갈한 일상은 조선의 선비들이 목숨처럼 지켰던 예(禮)와 시문(詩文)에 맥이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강둑으로 나온다. 더위가 어느새 가고 없다. 늘어지게 정자에서라도 눈 좀 붙이려 했던 정신이 맑게 개었다.

해를 잠재운 바람이 불고 있다. 문득 생각이 든다. ‘국토의 정중앙 양구서천’이라고 자랑한 연유가 이런 인문학적 서사가 강둑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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