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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달천(보은·괴산·충주)①

한국의 강-달천(보은·괴산·충주)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2.0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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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할 ‘사랑의 강’인가, 불심이 녹은 ‘벽계수’인가

강 마을 사람들은 이루지 못할 남매의 사랑이 피눈물로 흘러 ‘달래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가 원초의 욕망을 가로막아 이긴 징표는 ‘달내’의 낙조를 더 슬픈 보랏빛으로 채색한다 했다. 이 강은 세상을 떠난 곳의 세상, 속리산(俗離山)에서 출발한다. 벽조목 보다 더한 인고의 세월을 지나 부처의 이마(佛頂) 그 미간백호(眉間白毫)에 오른다. 이윽고해탈의 법열 그 달디 단(甘勿) 니르바나에 다다른다면, 저 강은 피안으로 이르는 강, 달천(達川)의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속세를 떠난 골짜기에서 생겨난 물

달천의 출발은 법주사 안마당을 돌아 나온 물에서 비롯된다. 백두대간 문장대(1,054m)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이 씨앗이다. 택리지는 삼파수(三派水)가 이 신비롭고 거대한 바위 문장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동으로 가는 물은 낙동강이요, 남으로 가는 물은 금강이요, 서로 가는 물이 한강이라고. 정확히 말해서 문장대를 기점으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금강까지를 포함하려면 속리산 천황봉(1,057.7m)이 기점이 되어야 한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다. 절집을 찾는 사람들로 주차장은 아침부터 북적거린다. 이 땅에서 부처를 믿는 많은 이들이 초파일에나 절집을 찾든지 등산길에 만나는 대웅전에 삼배하는 게 고작이다. 나는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절에 가 불상을 처음 만난 모태신앙이다. 천주교 냉담신자가 가지는 부채의식만은 못하더라도 인자하신 부처님이 내 곁에 있다고 믿는 ‘친불교성향’인 것만은 확실하다.

갈 길에 쫓겨 법주사 팔상전에도 서 계신 부처님께도 인사조차 못 드리고 나선다. 이내 우울한 정이품송을 만난다. 600년 세월을 견딘 노구라서일까 눈(雪) 무게조차 못 이기고 기어이 팔뚝이 잘려나가 장애의 몸이 되고 말았다. 잘생긴 외모에다 조선조 세조의 행차 때 눈치 빠르게 가지를 들어 올려 그 가상함을 인정받아 정2품 벼슬까지 얻은 귀족이다. 십 여리 근방에 정부인송(貞夫人松)까지 거느리고, 삼척 척준경 묘로 새 장가까지 든 복 많은 조선 제1의 소나무도 어쩐지 위엄이 옛날만 같지 않다. 세월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상판교를 건너면 달천은 북으로 치닫는다. 상판, 중판, 하판 많이 듣던 이름이다. 가평군에도 조종천을 따라 상판, 중판, 하판이 있다. 판(板)자는 넓다는 의미가 전제된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길은 농토라야 살점을 다 발라낸 갈비 정도만 끼고 흐르다가 어딘가에서는 제법 흙을 부려 넉넉해진다. 거기에 ‘판’자가 들어가는 마을이 선다. 중판교에서 강가로 시원스레 난 길이 유혹한다. 저기 산 아랫마을로 길이 나 있으리라는 믿음은 보이스피싱처럼 잡아끈다. 1km를 달려 벼랑에 막혀 서야 “역시 혹하면 안 돼.”하고 중얼거린다. 하판리에서 강가로는 자전거길이 반기지만 너무 산골짜기라 생뚱맞기 조차하다. 마을 이름이 ‘늙은이’다. ‘아래 널근이’를 그리 적은 거겠지만 참 별난 이름이다. 세강교를 건너면 황갈색 포장의 완전 자전거전용로다.  ‘묻지마 예산퍼붓기’라는 말을 들어도 싸게 생겼다. 그렇게 들판으로 난 자전거길은 온 데가 상처투성이다. 영양실조로 마른버짐이 일어서듯 아스콘이 다 들떠 속살을 보인다. 그냥 농기계와 사이좋게 나누어 쓰는 시멘트 포장 정도면 족할 것을....

=보은 대추가 춤추는 산골

골짜기마다 대추밭이다. 삐죽하니 웃자란 보통 대추나무와 달리 보은대추나무는 수확하기도 좋게 어른 가슴 높이에다 키를 맞춘다. 흡사 멀리서 보면 두 팔을 벌려 지나는 길손을 맞는 듯이 다정하기조차 하다. 보은이 대추로 유명한 것은 “비야, 비야, 오지 마라. 대추 꽃이 떨어지면 청산 보은 시악시 시집 못 가 눈물 난다.”는 옛 노래만 봐도 그렇다. 대추의 주산지는 경산, 연산, 임실과 함께 보은이 꼽힌다. 다산(多産)의 상징이라 혼례, 제사상에 빠짐이 없고, 순하디순한 과일이라 한약 처방 열에 여덟에는 꼭 들어간다. 비타민이 풍부하여 냉증 같은 부인병과 비염, 과민성대장증후군에도 좋단다. 개량종 ‘복조’가 주종을 이루고, ‘무등’, ‘금성’, ‘월출’ 같은 품종이 있으나 보통 눈으로 식별은 어렵다. 생산량은 경산보다  뒤지지만 보은대추는 ‘약대추’로 대접을 받는다. 직경 30mm는 별초이고, 25mm가 특초다. 나머지도 상초, 중초, 골초로 나누고 요즈음은 비가림막으로 당도를 더 높인 대추도 나온다.

백현교와 장갑교를 건너서면 달천은 북으로 행진하던 발길을 서쪽으로 돌린다. 산외면 동화리와 원평리 쪽 강둑은 때아닌 여름에 눈을 맞은 듯 화안한 가로수 행렬이다. 이팝나무의 도열이다. 꽃이 하얀 쌀밥 같다. 이팝꽃이 풍성하면 풍년이 들고, 듬성듬성 하면 흉년이 들어 ‘점쟁이 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이맘때가 춘궁기였으니 쌀밥에 대한 포원은 좁은 논밭뙈기 안고 있는 강둑까지 한스럽게 뿌리박고 있다. 입하(立夏) 즈음에 꽃이 핀다하여 이팝나무라 했다는 설, 벼슬을 해야 이팝을 먹을 수 있으니 군왕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설도 있다. 허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조상님네 살림살이에 더 와 닿는 이야기가 있다. 열여덟 살 며느리가 하도 배가 고파 제사상에 놓을 쌀밥을 먼저 먹다가 구박을 받아 목숨을 끊고 그 한으로 피어난 게 이팝꽃이라니 말이다.

서말지 무쇠 솥 넘치도록/ 너실 너실 잘 퍼진/ 저 이 밥/ 찌들은 가난에/ 배곯은 영혼들 위해/ 뭉실 뭉실 한 김을 솟아 올리고 있는 ( ‘이팝꽃’ 전문, 신구자) 

 

=배곯던 날의 소망, 시루떡 찌는 길탕골

강둑길로 가다가도 큰길로 나가라고 막아서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길탕골 입구도 그렇다. 더구나 근자에 세운 마을 유래비는 유난히 공이 많이 들어있다. 지금은 한 세대도 남아 있지 않은 입향시조 호(扈)씨에 대한 내력에서부터 시루산 탕골에서 시루에 떡을 찌고,  달천물이 흐르는 질골에서 질그릇을 설거지 했다고 하는 골짜기니 풍요롭기도 하였겠다. 당장 땟거리가 아쉬운 형편에 떡을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을의 경사이자 가난에 지친 삶에 몽환처럼 다가오는 위로가 아니었겠는가. 가난을 달고 살았기에 먹고살 만해진 골짜기는 더욱 자긍의 줄기가 되었으리라. 십시일반 뜻을 함께한 마을 사람들과 출향 인사들의 고향사랑이 오석에 새긴 글자 한 획마다 깊이 담겨 있다.

이식리와 봉황리를 지나면서도 강둑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잡초의 저항에 나의 종아리도 맞선다. 그만큼이 관청이 힘을 써야 할 구간이다. 별스럽게 생색을 낼 자전거길 개설을 원하는 게 아니다. 거기는 힘들어도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시늉만 내줘도 강마을 길손은 그저 감사하며 다 지나가게 되어있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이다. 달천은 북서방향 내륙으로 깊이 들어왔다가 다시 북상한다. 옥화자연휴양림에서 옥화대, 금관숲으로 이어지는 강은 골짜기가 깊어 도로와 동행해야 한다. 예나 제나 사람들은 용케도 좋은 곳을 알아서 물을 즐긴다.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이 물이 줄어든 강변에 여럿 엎드려 있다. 지방마다 이름이 달라 골뱅이, 고디, 올갱이로 부르는 다슬기. 숙취에 좋다는 다슬기를 젖히고 ‘올갱이해장국’으로 표준어반열에 올린 것도 충청도 올갱이의 힘이다. 괴산 올갱이는 결국 달천과 그 새끼들이 키워낸 토종의 힘이다.

여름날 강둑은 벚꽃이 지고 나면 그늘을 선물한다. 귀만리 후평리로 가는 길은 강둑길과 논둑길이 뒤섞여 있다. 달천강과 숨바꼭질하며 가는 길목 후평교 아래에 청천학생야영장이 있다. 이미 점심도 지나 시장기는 장딴지까지 힘을 나눠줄 기력마저 없다. 강마을의 매운탕은 통과의례다. 모든 음식이 그렇기는 하지만 매운탕만큼 손맛에 달린 음식도 드물다. 무조건 매워도 안 되는 그 달착지근하고도 화끈함. 양식이 없는 잡어매운탕으로 정한다. 양식할 가치도 없는 모래무지, 꺽찌, 피라미가 빈약한 몸피에도 불구하고 탕맛을 위해 몸을 던졌다.   갈 길이 멀어도 포만감에 누운 평상 위로 여름 한나절의 해가 슬슬 기울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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