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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50.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50.

  • 기자명 박관우 기자
  • 입력 2019.12.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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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뿔이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 발톱이 할퀼 곳이 없네

장주식 작가

‘조장(助長)’ 이야기를 해 볼게요. 조장이란 한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자라는 것을 돕는다.’가 됩니다. 동양 고전인 <맹자> 공손추 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송나라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밭에 심은 곡식이 싹을 틔우긴 했는데 잘 자라지 않는 겁니다. 빨리 쑥쑥 자라면 좋겠는데 말이죠. 밭둑에 서서 안쓰럽게 바라보던 송나라 사람이 무릎을 칩니다. 좋은 생각이 났던 거지요. 이 사람은 밭에 들어가 곡식 싹들을 뽑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을 했지요. 싹은 뿌리가 조금씩 뽑혔지만 키가 커 보입니다. 만족스런 얼굴로 이 사람은 집에 돌아가 큰 소리를 칩니다.

“내가 오늘 몹시 힘들다. 싹이 자라는 걸 도와주느라고 말이야.”

“예?”

아내와 아들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들이 밭으로 뛰어갑니다. 이런! 곳곳에 시든 싹이 보입니다. 어떤 싹은 말라서 아예 땅에 누워버렸습니다. 아들은 기가 막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맹자는 말합니다.

“세상에 싹이 자라는 걸 돕겠다고 나서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밭의 싹을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자는 무익할 뿐이지만, 자라는 걸 돕는다고 싹을 뽑아 올려두는 자는 무익함을 넘어서 해치게 된다.”

 

여기서 발묘조장(拔錨助長)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애써 노력했지만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는 일을 비유하게 되었죠. 맹자는 세상에 ‘조장’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데요, 노자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살 사람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경우가 열에 셋이다.”

 

살 사람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경우가 바로 맹자의 조장에 해당합니다. 맹자는 드물다고 했는데 노자는 30% 정도라고 했으니 숫자가 더 적군요. 살 사람이 왜 죽을 곳을 갈까요?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이랍니다. 그것을 ‘생생지후(生生之厚)’라고 표현합니다. ‘살리고 살리는 일이 두텁다’고 풀이가 됩니다.  조장과 아주 비슷합니다. 조장 역시 허리가 끊어져라 부지런히 싹을 뽑아 올리는 일이니까요. 빨리 빨리 자라기를 바라는 욕망이 살리고 살리는 욕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조장과 생생지후는 살리려다 죽이는 일이 됩니다. 살 사람이 죽을 곳으로 빠져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망의 골짜기로 들어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노자는 그런 물음을 예견하고 대답을 준비해 뒀습니다.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무소를 만나도 뿔로 들이받히지 않고, 호랑이를 만나도 발톱으로 할큄 당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도 적병이 무기로 찌르지 않는다.”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죽을 곳에서도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섭생(攝生)’이기에 그럴까요? 노자는 말합니다.

 

“죽을 곳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죽을 곳’이라는 사지(死地)는 무얼 뜻할까요? 노자의 말에 따르면 바로 ‘생생지후’입니다. 삶에 집착하는 것 말입니다. 집착이 많을수록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지겠지요.

 

<핵소고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주인공 데스몬드 도스가 의무병으로 전쟁터에 갑니다. 세계2차대전 막바지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도스는 무기 없이 전쟁터를 누비며 부상병을 무려 75명이나 살려냅니다. 마치 노자의 선언인 ‘전쟁터에 나가도 적병이 무기로 찌르지 않는다.’를 증명한 셈이죠.

도스에겐 전쟁터가 ‘죽을 곳’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곳이었던 겁니다. 결국 죽을 곳은 겉으로 보이는 곳만이 아니라는 거죠.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곳도 쉽게 죽을 곳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을 벗어날 때 죽을 곳은 점점 더 많아지겠지요.

 

<노자 도덕경 50장 : 出生入死(출생입사)하나니 生之徒十有三(생지도십유삼)이요 死之徒十有三(사지도십유삼)이라. 人之生(인지생)에 動之死地(동지사지)도 亦十有三(역십유삼)이니 夫何故(부하고)인가? 以其生生之厚(이기생생지후)이니라. 蓋聞善攝生者(개문선섭생자)는 陸行不遇虎兕(육행불우호시)하며 入軍不被甲兵(입군불피갑병)이라하니 兕無所投其角(시무소투기각)하고 虎無所措其爪(호무소조기조)하며 兵無所容其刃(병무소용기인)이라. 夫何故(부하고) 인가? 以其無死地(이기무사지)이니라.>

 

나오면 삶이라 하고 들어가면 죽음이라 하니 삶의 길을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이요, 죽음의 길을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이라 자연스럽다. 그러나 살 사람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것도 또한 열에 셋이 있으니 왜 그러한가? 살고자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들었다.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숲이나 들판에서는 호랑이나 무소를 만나지 않으며 전쟁터에 가도 무기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다. 무소는 그 사람을 뿔로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병사들은 칼로 찌를 곳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러한가? 그 사람은 죽을 곳을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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