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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49.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49.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19.12.1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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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다섯이 정기적으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모임이 있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한 회원이 금식해야 한다며 물만 한 컵 마시겠다고 합니다. “아니, 왜?” 하고 다들 물었지요.

“내일 대장 내시경 촬영을 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요. 촬영을 하려면 대장을 말끔하게 비워야 된다는 걸 다들 아니까요. 고기를 굽고 찌개가 끓으니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퍼집니다. 왁자하니 떠들며 맛있게 술도 마시고 밥도 먹습니다. 하지만 대장내시경 회원은 물 한 컵만 놓고 있을 뿐입니다. 회원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안타깝군.”

“상황이 그런데도 참석해줘서 고마우이.”

그렇습니다. 참석한 그 발걸음은 참 훌륭합니다. 얼마든지 불참 사유가 되지만 함께 하겠다는 그 마음이 참 귀합니다. 동석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느끼는 마음인 것이죠. 여기서 나는 노자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이 다른 모든 이들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다.”

다섯 명 회원이 모이는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섭섭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대장내시경 회원은 참석을 한 것이죠.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행동에 다름없습니다.

 

이런 성인의 마음은 노자에 따르면 이렇게도 확장이 됩니다.

“착한 이에겐 나도 착하게 하고 착하지 않은 이에게도 역시 나는 착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착하지 않은 이에게도 착하게 한다.’는 것이죠. 우리 옛이야기에 흥부전이 있습니다. 가난한 주인공 흥부는 형 놀부네 집에 밥을 얻으러 갑니다. 마침 밥을 푸고 있던 형수는 “아따, 이놈! 이거나 먹어라.” 하고 밥주걱으로 흥부 뺨을 갈깁니다. 그러자 흥부는 다른 뺨을 내밀며 말하죠.

“형수님. 이쪽 뺨도 마저 때려주세요.”

밥주걱에서 나와 볼에 붙은 밥알을 떼어먹겠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흥부가 형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형수는 분명 착하지 않은 이인데 흥부는 똑같이 착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죠.

형 놀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동생 흥부에게 나눠줘야 할 재산도 형이 다 차지한 것이지만 흥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흥부가 부자가 되고 놀부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흥부는 형 가족을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흥부 행동은 노자가 말하는 ‘착하지 않은 이에게도 나는 역시 착하게 한다.’는 명제와 딱 들어맞습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 성인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의 행위가 이런 식이라면 나도 한번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행위는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노자의 주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성인은 사람들을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한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귀와 눈에 사로잡혀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목(耳目)은 우리 내면을 흔들어 놓는 대표적인 감각기관입니다. 보는 것이 법칙이 된다는 말도 있듯이 눈에 보이는 것에 우리는 쉽게 빠져듭니다. 물론 듣는 것의 위력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그것만이 전부라고 고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노자는 상심(常心)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고정된 마음 또는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상심으로 모든 사물과 일들을 재단하면 다양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툼 속에 살아가는 것이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인 것 같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상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성인은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를 사랑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고집스럽고 때로는 이분법에 빠져 구별 짓고 화내고 다투지만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따라 해보려는 성인의 행위 가운데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하는 이 부분은 좀 어려운 것 같군요. 내 마음을 고집하지 않는 무상심(無常心)이나, 나에게 착하지 않게 대하는 이에게도 나는 착하게 대하는 덕선(德善)은 그런대로 노력하면 해볼만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접을 필요는 없습니다. 무상심으로 덕선한다면 자연스럽게 ‘어린아이를 사랑하듯’ 하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으니까요.

 

<노자 도덕경 49장 : 聖人無常心(성인무상심)으로 以百姓心爲心(이백성심위심)이라. 善者吾善之(선자오선지)요 不善者吾亦善之(불선자오역선지)는 德善矣(덕선의)라. 信者吾信之(신자오신지)요 不信者吾亦信之(불신자오역신지)는 德信矣(덕신의)라. 聖人在天下(성인재천하)에 歙歙爲天下渾其心(흡흡위천하혼기심)하여 百姓皆注其耳目(백성개주기이목)을 聖人皆孩之(성인개해지)하나니라.>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어 모든 이들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는다. 착한 이는 내가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이도 내가 역시 착하게 대하니 덕은 착하기 때문이다. 믿음직한 이는 내가 믿음으로 대하고 믿음직하지 않은 이도 나는 역시 믿음으로 대하니 덕은 신뢰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천하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세상과 그 마음을 뒤섞어 흔쾌히 하나가 되니, 백성들이 자신의 귀와 눈으로 본 것만 고집하는 것을 마치 귀여운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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