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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47. 좁은 길로 멀리 가다
장주식 작가

현대사회에서는 대학교수나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학문이나 경력 등을 매우 높게 인정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교수나 의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위안부를 돈을 벌기 위해 제 발로 간 ‘매춘부’들이라고 얘기하는 교수가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위안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분군에게 강제 동원되어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입니다. 실제로 당한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고, 다양한 증언들이 나왔지만 그 교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식인으로 대우 받는 교수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과 주장을 하는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노자에 따르면 ‘한 가지 좁은 길로 멀리 갔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길이 있고 넓은 길도 있지만 가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걸은 좁은 길이 보여주는 것들로만 내 신념을 만든 것이죠.

국회의원이나 꽤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 중에도 의아한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사정부시절 반독재투쟁 선봉에 섰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변신하여 자신이 투쟁하던 대상과 한 배를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진영논리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 추켜세울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런 정치인 역시 제 생각에는 ‘좁은 길로 멀리 갔다’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그런 류의 정치인이 갖고 있는 좁은 길이란 권력을 향한 욕망이나 그와 비슷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굳이 교수나 정치인만 그런 것은 아니죠. 평범한 서민들도 얼마나 좁은 길로 멀리 가는 경우가 많은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우스개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들판을 걷고 있는데요. 꽤 먼 논둑에 검은 물체가 앉아 있습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까마귀가 앉아 있네.”

“내가 보기엔 검은 비닐봉지인데?”

 두 친구는 까마귀야, 비닐봉지야 하고 서로 주장하다가 “가서 확인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검은 물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까마귀 같으면 벌써 날아갔을 텐데요. 비닐봉지였던 거죠.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닐봉지라고 주장했던 친구가 득의 찬 미소를 지으며 친구를 바라봤죠.

‘내가 틀렸네.’

라는 말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런 말이 들려온 겁니다.

“그래도 까마귀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요, 하도 기가 막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아니, 보고도 그래? 이런 생떼가 어디 있나?”

“여기 있지, 어디 있어. 난 지기 싫어.”

 

 틀린 친구는 아주 당당하게 대꾸합니다. 어떡하죠? 예. 비닐봉지라고 맞춘 친구는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서 비닐봉지 친구와 같은 생고집 내지는 자기 시각에 고정된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합니다. 나도 행동과 말을 쉽게 하고 나서 후회하는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노자에게서 내면을 성찰하는 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지 않고도 인간세상의 이치를 알고 창문을 열어 밖을 보지 않고도 자연이 운행하는 이치를 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내면 성찰입니다. ‘바깥’이란 다양한 욕망덩어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위, 권력, 부, 명예 등등. 이런 바깥에 매이면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나 분주하게 다니고, 많이 봐야하고, 애써 뭔가를 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점점 아는 건 적어져서 고집스러워 질 수 밖에 없겠지요. 바쁘게 다니지 않고, 너무 많이 보지 않고, 애써 이것저것 하지 않는 상태에서 진짜 나를 되돌아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뭔가 내면에 허물을 감추고 있을 때 지나치게 말도 많아집니다. 물론 행동도 분주해집니다. 평화를 잃는 것이죠. 인간세상의 이치와 자연운행의 이치들은 고요한 가운데 통찰을 할 때, 알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물론 고요함은 편안함을 동반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 낙엽이 지는 나무를 묵묵히 바라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노자 도덕경 47장 : 不出戶(불출호)라도 知天下(지천하)하고 不闚牖(불규유)라도 見天道(견천도)하나니 其出彌遠(기출미원)할수록 其知彌少(기지미소)하나니라. 是以聖人(시이성인)은 不行而知(불행이지)하며 不見而名(불견이명)하며 不爲而成(불위이성)하나니라.>

 

방문을 나서지 않고도 인간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창문을 열어 밖을 보지 않고도 자연이 운행하는 이치를 알 수 있으니, 나아감이 멀어질수록 아는 건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애써 하지 않고도 이룬다.

장주식 작가  yeoju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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