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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6(서울·고양·파주·김포·강화)①

한강6(서울·고양·파주·김포·강화)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19.10.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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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끝은 김포가 아니다

1천300리 물길을 따라온 한강도 아라뱃길 초입을 지나면 허리띠를 푼다. 철조망으로 봉쇄된 강둑의 긴장과는 사뭇 다르게 느긋하다.  
바다가 밀고 당기는 시간에 맞춰 갯벌이 속살을 보이고, 강물로 이불을 덮는다. 뿌연 서울 하늘과 선명한 개성 송악산을 한강 언덕에서 다시 본다.
한강이 유도(溜島)에서 끝난다는 정의(定意)는 아무래도 틀렸다. 짠물이 아무리 소용돌이치는 바다라도 염하(鹽河)라고 이름 붙여 한강의 지류로 만든 옛 사람의 지혜는 탄복할 만하다. 연백평야를 마주하고, 벽란도로 들어가는 예성강 하구쯤에 와서야 한강과 작별할 수 있다.

사라진 저자도, 압구정의 영화

봄은 남산자락보다 한강에서 빠르다. 남산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전에 한강 변에는 자전거 꽃이 먼저 핀다. 중앙선 열차(원래는 경원선)가 벼랑 아래를 지나가는 입석대의 개나리가 언덕을 노랑 물감으로 칠한다. 자전거길을 따라 한강의 마지막 구간 여행을 시작한다. 두모포 앞 저자도(楮子島)라는 이름도 토박이가 아니면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물속에 가라앉은 섬이기 때문이다. ‘무동도(舞童島)’ 또는 ‘닥섬’이라고도 했다. 홍수로 일그러진 저자도 모래를 퍼내 강 건너 압구정동의 공유수면을 매립한 것이 1972년이다. 압구정은 한명회가 권세를 누렸듯이 지기(地氣)가 여태 남아서일까 ‘신귀족’들이 사는 특구가 되었다.

서호는 서강으로 개명됐고, 동호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1969년 크리스마스 날 개통된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되면서 수도와 지방을 이어주었다.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꾸어도 그 시절 청춘의 우상인 혜은이가 율동과 함께 신바람을 부추기는 이름은 역시 ‘제3한강교’다.

자전거로 강남·북을 이어준 잠수교, 고맙다

다리 하나를 지나면 또 다리다.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상판을 얹은 잠수교는 한강의 다리 중에서 가장 물에 가깝다.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져 아예 장마 때는 물에 잠기는 걸 전제로 만든 튼튼한 다리다. 유람선 통과를 위해 상판을 들어 올린 곡선미에 건축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자전거가 한강을 건너가려면 곡예를 해야 했던 2004년, 서울경찰청 교통지도부장이던 나는 서울시를 억지로 꼬드겨 잠수교에 자전거길을 냈다. 마지못해 냈던, 좁은 인도 위의 자전거겸용도로는 확장되어 이제 다리의 절반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이층다리의 효용을 제대로 본 셈이다.   천천히 가도 되는 차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이 낮은 다리에선 허용된다.

이 다리를 지날 적마다 꿈꾼다. 햇볕이 따가운 여름 휴가철 한 열흘 만이라도 이 다리에 차량을 얼씬도 못 하게 하는 발상은 어떨까. 휴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달빛무지개 분수를 감상하는 여름밤은 어떨까. 비가 내리더라도 이층다리 아래라 젖을 염려도 없다. 교통체증을 걱정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휴가철에는 시내 전체교통량도 줄어들 뿐 아니라 반포대교만으로도 충분히 소화하고도 남는다.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한 파리 시민을 위해 세느강에 인공백사장도 만든다는데 이것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다.

동빙고와 서빙고, 한강 얼음이 돈이 되던 시절

얼음을 만들 수 없었던 시절, 겨울 한강은 바빴다. 강이 4치(12cm) 이상 얼면 사각으로 잘라 소달구지로 둔지산(이태원 일대) 빙고로 날랐다. 동빙고는 왕실 제사용으로, 서빙고는 정2품 이상 고관 대작용이었다. 조선조 광해군 때는 빙계(氷計)만이 얼음채취권을 독점하자, 얼음으로 먹고살던 상인들이 반발했다. 결국 정조 때 와서 격쟁 끝에 합정동 하류는 일반에게, 상류는 빙계에게 채취하는 것으로 길을 터 주었다.

동부이촌동 앞 한강 백사장은 넓고 넓어서 아낙들이 시내에서부터 이고 온 옥양목 이불빨래가 온종일 모래 벌에서 펄럭거리며 말랐다. 1956년 5월 3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의 유세에는 25만 인파가 그의 유세를 들으려 백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이틀 뒤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그가 갑자기 서거한다. 막 발표되었던 신곡 ‘비나리는 호남선’은 해공의 추모곡처럼 공전의 히트를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해공이 살았더라면 이 땅의 정치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은회색 한강대교는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트러스트 구조이나 한 많은 다리다.

6.25 전란 때 국군의 손으로 폭파했던 한강대교는 1917년에 일제의 손으로 놓은 다리다. 전쟁이 터지자 치안국 감찰계장 김종삼이 국고를 죄다 현찰로 바꾸어 트럭에 싣고 도강 일보 직전에 다리가 끊겨버렸다. 경찰관들이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지고, 트럭도 나머지 돈도 버린 채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지시로 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대령은 사형당했고, 1962년에야 원혼에게 무죄가 선고된다.

마포종점과 여의도 비행장의 불빛

마포대교 아래를 지난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 마포는 종점이었고, 여의도는 비행장이 있는 모래섬이었다.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가사는 모두 한 시대의 풍경을 그렸다. ‘너(汝)나 가져라’라는 얘기를 씨앗으로 품고 있는 섬이 오늘날 금융과 방송의 중심이 되었다. 안창남의 비행에 구름같이 몰려오던 식민지 백성의 환호도 역사의 빛바랜 장면일 뿐이다. 여의도를 떠난 비행장은 성남으로 옮겨가 서울공항이 되었다. 1968년 나룻배를 만들던, 밤섬 주민 78가구 443명은 강 건너 창전동 와우산 자락 연립주택으로 이주하고, 마포구 율도동은 완전히 사라졌다. 여의도를 제대로 된 섬으로 만들려면 한강 폭 1,300m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해 뒤 무너져 내린 와우아파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들은 지금도 동제(洞祭)를 지내며 향수를 달래는지 궁금하다. 폭파된 밤섬 화강석 4만 트럭 분은 여의도 윤중제를 16m 높이로 쌓는 데 들어갔다. 해마다 4월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여의도 벚꽃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바다를 이룬다.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국회의사당을 애써 외면해 보지만 보통사람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귀빈들의 카퍼레이드는 마포를 통하여 서소문으로 들어오며 꽃가루 세례를 받았다. 정부는 낙후된 도화동, 공덕동 큰길을 ‘귀빈로’라고 이름 붙이고, 외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빌딩을 짓도록 권장했다.

한 시절 마포대교 아래는 분주했다. 투신한 사람의 시신을 건지기 위해 돈을 받고 일하는 머구리(잠수부)들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수색은 지지부진하고, 흥정이 붙기까지 했다. 모터보트 한 대를 가지고 파견 나와 있는 경찰관은 직속 상관으로 부임한 외근계장에게 관내를 설명한다면서 밤섬 안으로 배를 몰았다. 7만 평 남짓한 밤섬은 그때도 새들의 낙원이었다. 홍수에 떠내려와 걸린 버드나무가 숲을 이뤘고, 물가 풀 섶에는 새 둥지가 지천이었다. 사람이 쫓겨난 자리에 자연이 주인이 되어있었다. 한강에 유골을 뿌리는 나룻배는 수시로 강을 오르내렸다. 잉어를 방생하는 굿판이 강 위쪽에서 벌어지고 나면 토정 이지함의 초막이 있던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강 아래쪽 소(沼)에서는 다시 고기를 잡는 어부의 그물질이 부산했다.

절두산과 당인리화력발전소의 변신

잠두봉은 자연으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다. 양화진 나루가 바로 앞이고, 멀리 선유봉이 보이는 풍경은 한강의 풍광 중에서도 백미라고 전한다. 그러나 ‘절두산’이란 이름으로 부르면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피가 그대로 흐르는 기분이다. 구한 말 ‘제4의 헤이그밀사’로 활약했던 헐버트처럼 조선을 모국만큼이나 사랑한 외국인들이 대를 이어서 영원히 잠든 곳이기도 하다.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내력도 간단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군대에 묻어온 중국인이 조선 처자를 사모하여 눌러앉았는데 그 처자가 경상도 한 부자의 첩으로 시집 가버렸다. 부자가 죽자 본부인에게 구박을 받고 돌아온 여인을 중국인은 그때까지 기다리다 결혼하고 아들딸 낳고 살았다는 당인리(唐人里)다. 검은 석탄 연기를 내뿜는 발전소 때문에 상수동 일대 가난한 판자촌은 그나마 빨래조차 내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화력발전시설은 모두 지하화 되었다. 베이징 따산즈의 ‘798공장예술구’처럼 살아있는 공장갤러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상수동은 살아남고, 하수동은 사라졌다.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기찻길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도 홍대 앞 문화 거리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 미술대학의 전설인 홍익대 발 자유분방함이 한류가 가지는 상상의 바닥을 지탱하고 있다.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의 흔적은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을 바꾸고, 발전소의 수명을 다해도 끈질긴 지명으로 살아 숨 쉴 것이다.

 

□한강(중랑천하구-한강하구 지류하천)
-국가하천: 안양천, 공릉천, 임진강 (제1지류 3개)
-지방하천: 홍제천, 창릉천, 굴포천, 계양천, 봉성포천, 장월평천 등 (제1지류 14개)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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