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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42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42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19.10.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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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기운을 텅 비게 하여 조화를 이루다

‘부드러움을 등에 지고 강함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내 몸의 기운을 텅 비게 하여 조화를 이루는’ 도의 방식

 

장주식 작가

어떤 일에 대한 대응은 다양합니다. 아래 상황을 한 번 볼까요.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 씩 대학생 딸을 고속버스 타는 곳까지 승용차로 데려다 줍니다. 버스 타는 곳은 집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딸과 아버지는 버스 출발시각 25분 전에 집에서 나가기로 약속을 해둡니다.

그런데 딸이 외출 준비가 늦어 버스 출발시각이 2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만약 가는 길에 변수가 생기면 표를 예매한 고속버스를 못 탈 수도 있습니다. 변수란 다양하지요. 신호를 길게 받거나 차가 많아 길이 정체될 수도 있습니다.

자, 이때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는 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냐? 좀 빨리 준비하면 되잖아.”

그런데 딸이 한번이 아니라 자주 시각을 지키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버지는 딸의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이렇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버릇을 고쳐야겠다. 안 데려다 주겠어. 네가 알아서 가!”

집에서 고속버스 승차장까지 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내버스는 두 시간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시각을 맞추는 건 어렵습니다. 택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택시는 요금이 많이 들지요. 아버지가 이렇게 행동하면 아마 딸도 화가 나서 신경질을 부리게 될 겁니다.

또 다른 행동은 아버지가 데려다 주기는 하지만 시각을 맞추기 위하여 급하고 위험하게 운전을 합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가거나 차들을 추월하는 등 곡예운전을 합니다. 인상을 가득 쓴 얼굴을 하고 말이죠. 이런 운전을 하는 아버지 옆에 탄 딸은 좌불안석일 겁니다. 속으로 아버지를 탓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하는 이 두 가지 행동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약속 시각을 지키지 못한 건 딸에게 책임이 있는데도, 딸은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반성하기보다는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고 아버지와 싸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버지는 딸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혼을 내는 대신 점잖게 운전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20분 걸리는 거리이므로 집에서 늦게 출발한다면 당연히 고속버스 출발시각에 도착 못할 수 있습니다. 안전운전을 해야 하니까요.

아버지가 이렇게 딸을 혼내지도 않고 짜증도 내지 않고 그저 안전하게 운전을 하고 있다면 딸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아빠, 빨리 좀 달려!”하고 재촉할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 준비가 늦은 것을 자책하며 ‘다음부턴 미리 미리 준비해야 겠다.’하면서 속으로 다짐하게 될 겁니다. 물론 ‘아이, 빨리 좀 가지. 일부러 늦게 가는 거 아냐?’하고 의심하며 짜증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딸이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보다 작을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스스로 생각을 바꿀 때에 변화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잔소리하고 혼낸다고 해서 딸의 행동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세상만사는 잃는 것이 얻음이요, 얻는 것이 잃음이 된다. 강하고 굳센 건 제대로 된 죽음조차 얻지 못한다 하니 나는 이 말을 내 삶의 으뜸 가르침으로 삼으련다.”

 그렇습니다. 위의 딸과 아버지의 예에서 아버지는 ‘강하고 굳센’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부드럽고 약한’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딸을 혼내고 잔소리 하고 급하게 운전하는 방식은 강하고 굳센 방식입니다. 반면 안전운전을 하여 편안하게 이동하는 방식은 부드럽고 약한 방식입니다. 물론 이때 딸은 예매한 시각의 버스를 놓치고 30분이나 한 시간을 더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야하겠지만 말입니다. 딸은 다음 버스를 타야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노자에 따르면 ‘부드러움을 등에 지고 강함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내 몸의 기운을 텅 비게 하여 조화를 이루는’ 도의 방식입니다. 울화통을 비우고 평화를 가져오는 방식이기도 하겠지요.  

 <노자 도덕경 42장 : 道生一(도생일)하고 一生二(일생이)하고 二生三(이생삼)하고 三生萬物(삼생만물)하나니라.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하여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하나니 人之所惡(인지소오)는 唯孤寡不穀(유고과불곡)이나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이라.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하며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하나니 人之所敎(인지소교)는 我亦敎之(아역교지)라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불득기사)하나니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하노라.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끌어안아 기운을 텅 비워 조화롭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롭고, 적고, 착하지 않음을 싫어하기 마련이라 큰 사람은 스스로를 낮춰 외롭고, 적고, 착하지 않음을 자기 이름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세상만사는 잃으면 얻고 얻으면 잃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가르침으로 삼으니, 나 역시 훌륭한 가르침으로 여긴다. 또한 강하고 굳센 건 제명에 죽지 못하기 마련이라 나는 앞으로 그것을 ‘으뜸 가르침’으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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