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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별기획 - ‘훈민정음’ 탄생에 숨겨진 비밀

한글날 특별기획 - ‘훈민정음’ 탄생에 숨겨진 비밀

  • 기자명 조병인 박사/ 경청리더십 전문가
  • 입력 2019.10.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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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적폐 청산해 재앙 막아볼 의도’로 훈민정음을 지었다

일반 백성이 각종 법령과 판결문을 술술 읽을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백성이 살아가는 기쁨(生生之樂)을 느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

*세종어제훈민정음(언해) 世宗御製訓民正音(諺解) 출처=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지었나?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어떤 언어로 어떻게 칭송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우리민족 최대의 축복이고 최고의 자랑거리다. 세계의 수많은 문자들 가운데, 만든 사람, 만든 이유, 만들어진 원리가 책자로 분명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문자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창제된 과정만은 수수께끼처럼 철저하게 비밀에 가려져있다. 그것이 비밀로 된 이유마저도 비밀로 되어 있어 갖가지 억측들이 난무한다. 근래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을 다룬 영화가 개봉되었다가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려 조기에 종영된 일도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어제서문은 이(異)·민(燜)·편(便) 정신을 담고 있다. 이로써 보면, 세종은 ‘한자를 몰라서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이 가엾어 보여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편하게 해주려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 전반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어제서문에 없는 진기한 ‘숨은 그림’이 시야에 잡힌다. 바로, 세종께서는 ‘사법적폐를 청산해 재앙을 막아볼 의도로’ 훈민정음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훈민정음의 573번째 생일을 맞아 그 이야기를 공개하겠다.

2.  재해가 닥치면 죄수들을 풀어주다   

세종의 성군 이미지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세종 재위 막바지 3년 동안 국가 차원의 ‘도둑사냥’이 있었다. 그 결과로 도둑들이 무더기로 사형에 처해지는 끔찍한‘참극’이 벌어졌다. 재위 29년 7월부터 31년 10월까지 불과 28개월 사이에 5백 명 이상의 도둑이 사형선고를 받고 떼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반전이 생겼다. 도둑의 씨를 말릴 것처럼 무자비하고 살벌하던 ‘도둑사냥’이 하루아침에 돌연 잠잠해진 것이다. 원인은 왕실의 우환이었다. 임금과 세자가 교대로 몸이 편치 않아 사형집행이 정지되니 사냥의 동력이 사라졌다. 쾌유를 비는 사면이 반복되니, 도둑이 붙잡혀도 곧 풀려났다. 어이가 없게도, 사면의 남발로 초래된 ‘도둑과의 전쟁’이 사면의 홍수 속에 멈추는 ‘조화속’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못 가서 세종이 숨을 거두니 추상같던 ‘도둑토벌작전’도 유야무야되었다. 그렇다면 사면 때문에 ‘도둑과의 전쟁’이 촉발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였다는 말인데, 이 상황을 어떻게 새겨야 할까? 도대체 사면이 뭐기에 ‘통치의 달인’이었던 세종조차도 그것에 맥없이 휘둘리다 어이없게 낭패를 겪었을까?

알고 보니, 세종이 그토록 자주 죄수들을 용서하여 죄를 면해준 것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 가뭄·홍수ㆍ천둥ㆍ번개ㆍ벼락ㆍ일식ㆍ월식 같은 천변(天變)이나, 왕실의 우환ㆍ대형사고ㆍ전염병ㆍ괴변 등을 막기 위해서였다. 특히 가뭄이 닥치면 거의 기계적으로 옥문을 열어서 죄수들을 대거 풀어주었다.

이유는 세종이 유학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유학자였던 세종은 머릿속이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경외심)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세종에게 있어서 하늘은, 인간세계의 군왕들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반드시 가혹한 재앙으로 응징을 가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세종은 32년을 보위에 있으면서 모두 32번의 대사면(일반사면)을 단행했다. 다양한 이유로 사면령을 내린 가운데, ‘비를 비는 뜻’으로 단행한 경우가 12회로 빈도가 가장 높다. 가뭄이 길어지자 임금이 겁을 집어먹고 사면을 단행한 해가 많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농업 국가에서 가뭄이 계속되면 나라 전체가 위기로 몰리기 때문에, 가뭄이 닥치면 임금이 비장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사면을 단행해 재앙이 그치기를 기다린 것이다. 특정 개인의 죄를 용서한 특별사면도 24차례나 있었다.

또, ‘보방’을 27번 단행해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였다. 연평균 1회 이상 죄수들을 대거 풀어주고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수사 혹은 재판을 받게 한 것이다. 보방 사유를 보면 ‘가뭄’이 21회로 전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무더위로 보방을 실시한 4회까지 합치면 전체 보방의 81퍼센트가 비가 오기를 기대하고 단행한 것이었다. 임금이 ‘자연재해와 형벌의 인과관계’를 신앙처럼 믿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하늘을 무서워한 것과 재앙이 닥치면 죄수들을 대거 용서한 일 사이에는 어떤 연결이 있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만년 형사학도인 내가 찾아낸, 훈민정음 탄생의 이면에 감춰진 ‘숨은 그림’이다.

3. 재해 종식을 위해 사법개혁에 힘쓰다

한마디로, 세종은 재앙이 닥치면 그 원인이 관원들이 형벌을 바르게 쓰지 않은 데 있다고 여기고 서둘러서 사면령을 내렸다. 수사와 재판 또는 형의 집행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강압 수사를 하였거나, 판결을 장기간 지체하였거나, 아니면 판결을 잘못 내려서, 하늘이 경고를 보낸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또 재위 기간 내내 사법 적폐 청산을 위한 사법개혁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피의자에 대한 무리한 고문, 유전무죄 무전유죄, 재판거래, 사법농단, 제 식구 감싸기 등으로 인해 민간에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이 쌓이면 하늘이 혹독한 벌을 내릴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죄를 저질러 구금상태로 수사 혹은 재판을 받고 있거나 형이 확정되어 복역 중인 죄수들의 수용환경을 획기적으로 고쳤다. 허기, 폭염, 혹한, 질병, 학대 등으로 인해 죄수가 고통을 겪거나 목숨을 잃으면 마찬가지로 하늘의 응징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느 하나 임금의 뜻대로 된 것이 없었다. 기회만 생기면 ‘형벌을 삼가라’고 주의를 당부하고 위반자들을 엄벌에 처해도 효과가 없었다. 보다가 못해서 거의 애원 수준의 <휼형교지>를 반포해봤지만 무신경한 관원이 많았다. 그래서 지방에 수령들을 내보낼 때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형벌을 조심해서 쓰라.’고 환기를 시켜도 소용이 없었다.

이에 세종은 남형·체옥·오결과 같은 사법 적폐를 없애기 위한 전향적 처방들을 내놨다. 첫째로, 법조문에 대한 오해나 무지로 인한 오판을 줄이기 위해 법관들의 법률공부를 강화토록 하였다. 둘째로, 백성들이 법을 미리 알고서 범법을 피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금법조문’들을 방문처럼 시중에 내걸게 하였다. 셋째로, 악행의 근원을 없애볼 생각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해 전 국민을 상대로 인성교육도 실시해보았다. 하지만 ‘한자(漢字)’의 장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일반 백성은 아예 한자를 모르니 법을 알려줘도 도움이 안 되고, 한자를 아는 법관들도 법조문을 오독(誤讀)하여 오결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예전부터 전해오던 이두(吏讀)를 썼지만 여전히 법의 시행과정에 무수한 오류가 따랐다. 그러자 세종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경험을 새로운 도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사법 적폐로 인한 하늘의 견책을 피하려면 새로운 문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자개량’이라는 도발을 감행하였다. 순한 말들이 무수히 많은데도 ‘도발’과 ‘감행’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4. 백성보다 임금이 더 답답했을 가능성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주자학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겼다. 따라서 모든 국제질서가 명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상황에서 한자를 대신할 새 문자를, 그것도 임금이 친히, 짓는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명나라의 훼방이나 응징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성이 살아야 외교도 있고 사대도 있다는 일념 아래 독단으로 훈민 창제를 강행했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법관들이 법령을 오독할 가능성을 없애고, 일반 백성이 각종 법령과 판결문을 술술 읽을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아가는 기쁨(生生之樂)을 느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법제도는 수사·재판·행형 등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수령(부사, 목사, 지군사, 현감) 한사람이 독점하는 체제였다. 또, 수령은 용의자나 증인을 고문할 수도 있었던 반면, 상대방은 수령이 물으면 이실직고할 의무가 있었다. 형벌을 함부로 쓰거나 죄수를 학대하여도 고발할 사람이 없었다. 수령이 비리를 저질러도 고을 주민이 고발하면 무조건 무고죄에 처해지고, 노비가 주인의 범법이나 부당행위를 관청에 고발하면 접수도 하지 않고 목을 베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변호인제도나 언론 혹은 시민단체 같은 것도 없어서 상시적인 견제나 제3자 고발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법관들이 한문법전을 오독하기 일쑤고 백성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상황을 놓아두고서는 아무리 ‘어진 정치’를 펼치려고 애를 써도 언감생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다음에 오직 백성의 행복과 나라의 번영만 생각하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마침내 문자개량의 위업을 이룬 것이다.

비밀을 정리하자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배경에는 사법 적폐에 대한 백성의 불만으로 천지의 기운이 약해져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막중한 중압감이 있었다. 각종 사법 적폐로 백성의 원한이 쌓이면 하늘이 대재앙을 내려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상의 지평을 좀 더 확장시키면, ‘만약 당시의 사법행정이 투명하고 공정하였다면, 한자를 몰라서 생활에 불편을 겪는 백성이 많았어도, 훈민정음이 태어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는 추리도 가능할 법하다.   그뿐만 아니라, 앞의 추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면, 한자를 몰라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펼 수 없었던 백성들보다, 남형·체옥·오결 같은 사법적폐로 끔찍한 재앙이 닥칠까봐 365일 오매불망 노심초사한 임금의 속내가 훨씬 더 답답하고 초조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떠올려봄직하다.

글쓴이 조병인(65세) 박사는 여주시 가남읍 출신으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지냈고, 세종의 형사정책과  경청리더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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