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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한강3(충북-충주호②)

한국의 강-한강3(충북-충주호②)

  • 기자명 조용연 여주신문 주필
  • 입력 2019.09.2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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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던 한강이 단양에서부턴 주춤거린다.  

바다를 갈망하는 충청북도가 한강의 허리를 잘라 갖게 된 바다 같은 호수 충주호, 강물은 차례를 기다린다. 단양에서 충주는 물길만으로도 100리가 훌쩍 넘는다.

길은 온통 수몰의 흔적과 물을 피해 다시 똬리를 튼 산촌 곁을 멀미나게 넘나든다. “월악산 영봉이 물그림자로 비치면 태평성대가 오리라”던 전설은 현실이 되었고, 우리네 삶은 누가 뭐래도 해도 이만큼 살게 되지 않았는가. 

영험하기도한 조상님 전에 다시 한번 엎드려 국태민안을 빈다.

 

청풍명월의 원조, 청풍면

충주댐 건설로 5개면 61개 마을이 수몰되며 가장 유서 깊은 마을 청풍이 물에 잠겼다.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도’의 판권이 있다면 바로 청풍의 몫이다. 1978년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시작되자 청풍부의 흔적을 이대로 수장시킬 수 없다는 판단은 옳았다. 청풍면 물태리 망월산성 아래에 문화재 이주단지를 서둘러 건설했다. 보물, 지방유형문화재, 미지정문화재 등 53점이 모였고, 생활유물 1,900여점이 이 단지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청풍관아의 연회장인 한벽루, 청풍부 출입문이었던 금남루, 청풍부사의 집무실이었던 금병헌같은 관청의 고건축과 반가(班家)와 민가도 옮겨졌고, 영세불망 송덕비가 줄지어 옮겨 심어졌다.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선정을 베푼 나리님도 계셨겠지만 이리저리 눈치 보며 없는, 내키지 않는 공덕을 억지로 끌어모아 세운 송덕비가 있을 터이니 예나 제나 씁쓸한 세상이다. 남한강은 북쪽 금성, 송학, 봉양, 백운과 남쪽의 한수, 수산, 덕산을 거의 다른 세상처럼 갈라놓았다. 날씨만 해도 거의 한 절기가 차이가 날 지경이었다. 주택 또한 북은 강원도의 영향을, 남은 경상도의 영향을 각각 받았다. 말씨도 강원도 말씨에 가깝게 특이한 억양이 살아 있다.

 청풍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물산과 젓갈배의 주요한 거점이었다. 보부상들은 봇짐을 내려 체천, 영월, 주천, 평창으로 가는 장돌림을 시작했으니 이효석 소설의 무대 봉평, 대화장의 물건들도 상당수는 이 물길을 이용했다. 19세기 조선천주교 박해의 처절한 역사 속에서 대표적 성지로 자리 잡은 곳이 제천 배론 성지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땅과 배모양으로 입구가 좁아 관군의 습격을 미리 알 수 있던 천연 요새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한나절이면 백운, 천등산(울고 넘는 박달재의 배경)을 넘어 청풍 북진나루 근처에서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다는 것은 절묘하다. 하기야 사극은 그랬다. 말을 타고 쫓아오던 포졸도 이미 떠나가는 나룻배의 뒤꼭지를 망연히 바라보는 것으로 한 단락이 지어지곤 했으니까.

종합 레저의 결정판, 벚꽃이 아름다운 청풍랜드 일원

청풍대교를 건너 금성면으로 향하는 길은 대형리조트와 청풍랜드 같은 놀이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수상아트홀이 있고, 해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고 있어 한여름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제천관광정보센터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청풍이 제천관광의 메카역을 하고 있어서다. 잃어버린 청풍에 대한 안타까운 자부심 때문일까. 제천 사람들은 유독 이곳을 충주호라 하지 않고 ‘내륙의 바다 청풍호’라 부른다.

길을 확장하는 공사가 몇 년 째 지지부진이다. 언젠가 4차로가 교통체증을 뚫어 줄 테지만 한나절씩 밀려서도 보러오던 청풍호반의 벚꽃길은 벌써 여기저기 상처가 만발했다.  

이제는 귀하디귀한 비포장 호반길

금성면 구룡삼거리에서 다시 호수로 바짝 붙어 오후의 여정을 나선다. 한 이십 년도 더 되었지 싶다. 지프로 이 호반길을 먼지를 날리면서 구절양장의 길을 휘감았다 풀기를 반나절 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포장 길들도 산허리를 잘라가며 바르게 펴고 있는 중이다.

포장을 하더라도 이 구불거리는 길을 그대로 살리는 건 어떨까. 현지 주민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낭만이 돈이 되고 밥이 되는 시대’가 이미 와 있다. 아무런 특징도 없이 그저 그렇고 그런 마을을 만들기보다는 비포장이든, 소로든 간간히 다니는 차량들 만큼이나 서로 마주치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는 길을 지켜야 한다. 그 흔한 힐링 찾아 헤매는 도시의 보헤미안들에게 복음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후산리까지는 이미 제천에서 포장길이 들어와 있고, 황석리는 도로공사로 산허리가 벌겋게 잘려나가고 있다. 참 반가운 자전거 행렬, 두 쌍의 부부, 얼핏 보아도 중년을 넘긴 뒤태다. 스쳐 가는 그들에게 인사나 나누며 가자고 소릴 질렀다. 황석리 정자에서 보잔다.

그들은 제천의 토박이여서 청풍 북진나루에서 황석나루로 오던, 수몰된 옛 신작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청풍에서 황석과 후산으로 오는 강가에는 아주 평평한 길이 나있었지요. 정말 강나루길 풍경이 눈에 선 하구먼요.” 오늘 이 길도 멸종되고 있는 비포장 길의 한 구간이 되고 말 것이다. 부산리에서는 다시 한번 호수가로 길을 꺾어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로 긴 언덕길 비포장이 계속된다. 힘들어도 즐겁다. 멸종되어가고 있는 길에서의 추억을 고스란히 몸으로 간직할 수 있어 언덕길의 숨은 희열로 헐떡인다. 이제 싫든 좋든 간에 접어든 예순 중반의 고개는 산으로 가야 하는 여정에서는 초조하다. 언제 다시 이 길을 자전거를 타고 넘을 수가 있을 것인지. 돌부리를 피해가고 요철의 반작용을 용수철처럼 이용해야 하는 비포장 다운힐의 긴장이 오래전 전용 헬멧마저 후배에게 주어버린 내겐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다.

월악 영봉이 물그림자로 비치면

충주스카이레이크빌가족호텔과 하천교를 지나 동량면으로 빠지면 쉽게 목행, 탄금대에 이르는 남한강 길을 탈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강둑길 여행자라면 산악경기를 방불케 하는 물길 옆을 택해야 한다. 주봉산을 한 바퀴 감아서 충주나루로 가는 길이다. 사과밭과 인삼밭이 비탈에 늘어서 있는 언덕은 이름도 예쁜 미라실에서 시작된다. 마을마다 서 있는 유래비는 저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산봉우리, 옥녀의 젖가슴을 전설의 주역으로 내세우지만 결코 밉지 않다. 경운기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비켜야 하는 외길로 수리재를 오르면 넓은 호수 건너 희푸른 연무 속에 살미면이 잠겨있다. 그 너머가 월악 영봉(1,092m)이다.

 또 전설이다. “언젠가 후대에 월악산 영봉이 바다같이 넓은 물 위에 제 그림자를 비추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이 나라에  태평성대가 올 것이다.”는 말에 당시는 모두 황당하였으리라. 바다 같은 충주호가 만들어지고 비로소 월악 영봉의 물그림자가 비춰졌으니 얼마나 영험한 예언인가. 반만년 역사에 가난을 벗어던지고 풍요의 그림자를 고민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은 그나마 참 다행한 일이다. 반쪽짜리 한반도에서 이룬 기적을 이제 통일로 완성해야 하는 미완의 대업이 전설처럼 그렇게 뜬금없게라도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호운리 죽방치 고개로 가는 임도를 택해야 물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련만 그 험로는 또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수리재 고개에서 서운리로 내려오는 경사는 급하지만 포탄리, 희암리를 지나 충주나루로 오는 호반 길은 오히려 어쩌다 만나는 인기척이 반갑다.

 맞은편 계명산(775m)의 물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니 석양이다. 세세연년 괴롭히던 홍수와 범람을 잡아주고 있는 내륙의 바다 충주호의 든든한 파수꾼 충주댐까지 거칠 것 없는 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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