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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담 - 개살구의 재발견

여강여담 - 개살구의 재발견

  • 기자명 조용연 / 여주신문 주필
  • 입력 2019.09.2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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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살구 맛을 통해 보는 세상살이, 반려의 반열에 오른 개 팔자

조용연 / 여주신문 주필

올여름이 익을 때였다. 아침 자전거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란 열매가 한 무더기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개살구였다. 풀섶까지 뒤져 주머니가 터질듯 주워 온 다음날도 어제만큼의 개살구는 버림받은 듯 나뒹굴었다. 며칠을 모은 개살구는 두어 채반이나 되어 얼굴을 찡그리면서 먹어서 해결될 양이 아니었다. 잼을 만들어보자고 도전했다. 이게 웬일인가. 설탕과 열기가 조화를 이룬 노란 잼이 혀뿌리를 잡아당기는 새콤달콤한 맛으로 밥상에 올랐다. 내다 팔아도 될만한 ’특제잼‘이라고 아이들도 좋아했다.

떡살구는 저리 가라 하는 개살구의 맛을 다시 음미한다,

“개살구는 자기 겉 빛깔을 잃을 때 그 속살의 맛이 유별나다”는 목사님 말씀도 있다.

개살구가 들어간 속담만해도 그렇다. “빛좋은 개살구”는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 없는 것을 말한다. “개살구도 살구냐”라는 말도 개살구를 업신여기긴 마찬가지다. 1967년 김희갑, 황정순이 주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는 가족을 기쁘게 하려고 집에 들어와서는 사장 행세를 하는 가난한 월급쟁이 신세의 가장을 그리기도 했다.

두릅을 넘어서는 개두릅의 맛은 내가 봄나물을 기다리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엄나무순‘으로 불리는, 쌉싸름하면서 입맛을 돋우는 개두릅 향은 두릅보다 두어 배 비싸도 살만하다.

‘개’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천대의 의미를 덧바른 단어는 재조명되어야 할 판이다. 그래도 여전히 ‘개’가 앞에 붙은 단어는 부정의 언어로 정의되어 있다. ‘개떡’, ‘개죽음’, ‘개망신’, 하여간 찝찝한 단어다. ‘개’라는 접두사가 ‘견공’(犬公)을 뜻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멍멍이의 이미지가 연상되어 머릿속에 꽉 박혀 있는 걸 어쩌겠는가.

‘개판 5분 전’이란 말도 ‘6.25 전쟁’ 때 피난민 수용소에서 밥솥 뚜껑 열기(開板) 5분 전의 서로 먹으려는 아귀다툼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애먼 견공이 떠오르는 게 자연스럽다.

오늘날 접두사 ‘개’는 부사로 새로 자리매김했다. 젊은이들이 흔하게 쓰는 ‘개무시’라는 말도 사물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완전히’ ‘대단히’ ‘매우’의 의미로 쓰인다. 흡사 ‘열나’라는 구어체 속 부사만큼이나 사용빈도가 높다.

이제 세상이 변하고 ‘개’의 위상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일에 쫓기고, 돈에 쫓기는 자기 팔자를 한탄하며 빈정거리듯 늘어진 ‘개팔자’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개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언제부터였는지 선명하지 않다. 초파일이나 되어야 부처님 앞에 삼배하는 정도의 친불교성향으로서 “개고기 먹지 말라.”는 스님 말씀이 머리에 들어올 리 없다.

인도 신화에 “개는 생과 사, 현세와 내세를 잇는 사자(使者)‘여서 천국의 문까지 동행하는 영물(靈物)이기에  먹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차라리 “개는 나쁜 짓을 많이 한 네 조상이 이번 생에 개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는거야.”라고 겁주는 윤회가 더 피부에 와 닿는다.

개장국이 떳떳하기로는 그저 중국 연변 정도일 뿐, 이 땅에서 개고기는 간판도 내걸지 못한다. 보신탕이란 이름도 어쩐지 부끄러워 사철탕, 보양탕으로 위장 간판을 내걸기도 하지만 설 자리가 만만치 않은 세월이다.

이제 ‘개’는 애완의 시대를 벗어나 ‘반려’의 이름으로 아내나 남편에게나 붙이던 이름표를 달고 있다. 개를 함께 태우고 여행하고, 개를 호텔에 위탁하고 떠나는 애견가족에게 개를 함부로 폄하하는 언사를 쓰는 것은 위험하다.

개를 키우다 피서지에 버리고 가는 비정한 사람들도 할 말은 있단다. 사람은 건강보험이라도 되어 만 원 한 장 가지면 웬만큼 아픈 건 다 해결되는데, 개는 동물병원 한번 가면 몇 만원, 미용 한번 하려 해도 몇 만원이니 감당할 수 없어 버린 것이란다. 그래도 한밤중에 들어오는 내 발소리까지 알아서 반기는 그 충직한 동반자. 어찌 가족이랴 부르지 않으랴. 개 장례식에다 추모관 안치는 더 이상 얘깃거리도 아니다. “우리 새끼, 49제까지 지내주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까요?” 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걸 보면 고독사와 고립사의 공간에서 쓸쓸하게 세상 떠나는 인생을 생각하면 달라진 개 팔자다.

설사, 팍팍한 우리네 삶 이게 뭐냐고, ‘세상이 개판’아니냐고 말하고 싶더라도 참으시라. 그런 험한 말에 ‘내 사랑하는 개’가 동원되다니 주인이 대리인(?)이 되어 모욕이건 명예훼손이건 송사를 걸어오면 어찌 하실텐가. 개살구 맛을 새로 발견하고 적다 보니 여기까지 괴발개발 써 내려간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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