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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38. 꽃은 화려하나 얄팍하다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38. 꽃은 화려하나 얄팍하다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19.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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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덕은 인위가 없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지만, 

낮은 덕은 인위적이라 억지스러워 보인다

장주식 작가

최근에 방영된 <보좌관>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국회의원실 보좌관이 주인공입니다. 8회차 방영분에서 정의롭기로 이름 높은 국회의원이 투신자살을 합니다. 불법정치자금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검찰수사를 앞두고 일어난 일입니다. 후원금으로 들어온 돈을 합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개인통장에 넣고 쓴 것이 문제가 된 겁니다. 투신하기 전에 그 국회의원은 주인공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럽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나는 이제 더 이상 정의를 말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이 국회의원은 드라마 안에서 가난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 편에 서서 밤낮 일을 했거든요. 투신한 국회의원 빈소에서 주인공은 통곡하면서 부르짖습니다.

“그깟 오물 좀 튀었다고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요!”

주인공의 외침은 ‘어떤 놈은 똥통에 들어앉아서도 웃고 떠들며 잘만 살아가는데. 당신은 왜 죽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공자는 ‘행기유치(行己有恥)’라는 말을 합니다.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하게 하는 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와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을 바탕으로 나오지 않은 행동은 뭔가 겉치레로 꾸민 것일 수 있습니다. 겉치레는 내면의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외면에는 오히려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를 비판합니다. 맹자에 따르면 인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의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 예는 감사하고 양보하는 마음, 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이 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실마리를 인의예지라고 합니다. 하나같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덕목들이죠.

하지만 노자는 이 인의예지는 ‘덕과 도’를 잃어버려서 나온 겉치레라고 진단합니다. 노자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도’입니다. 도를 잃으면 덕이 필요하다고 하니까요. 또 덕은 상덕과 하덕으로 나뉘고 상덕은 도에 가깝지만, 하덕은 도에서 멀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인의예지, 네 가지가 하덕에 포함된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도는 황홀하고 미묘하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밖으로 드러날 때 ‘상덕’의 모습으로 보이는데요, 상덕은 마치 ‘부덕’ 곧 전혀 덕스럽지 않게 보인다는 겁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여 덕을 베푼다는 느낌도 전혀 없는 그런 모습. 그게 상덕으로 현상하는 도라는 거죠.

그런데 하덕인 인의예지는 아주 요란하다는 겁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악은 이렇게 응징하는 거야, 무례한 놈은 팔을 비틀어서라도 예의를 지키게 해야 해, 앞날을 예측할 지식도 갖추지 못한 무식을 깨뜨려야 해.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칭송하고 상을 주며 잔치를 벌입니다.

노자는 이런 잔치들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진정과 신뢰가 얄팍하고, 겉만 화려한 꽃이며, 혼란의 우두머리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인의예지라는 하덕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반면 상덕이나 도는 ‘두텁고 단단한 열매’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더러 열매가 꽃처럼 화려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열매는 수수하지요.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투신자살한 국회의원을 생각해 볼까요? 투신에 이르게 한 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도나 상덕에 내재된 열매이며 두터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두터움을 버리고 화려한 꽃을 취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끄러움을 내던져 버린 것이죠. 한마디로 예의만 남고 염치가 사라진 것이죠. 이런 사람은 겉으로 예의는 아주 멋들어지게 장식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결국 ‘하덕자’에 불과할 테지만 말입니다.

<노자 도덕경 38장 : 上德不德(상덕부덕)하니 是以有德(시이유덕)하고 下德不失德(하덕불실덕)하니 是以無德(시이무덕)이라. 上德無爲而無以爲(상덕무위이무이위)이나 下德爲之而有以爲(하덕위지이유이위)라. 上仁爲之而有以爲(상인위지이유이위)요 上義爲之而有以爲(상의위지이유이위)요 上禮爲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이면 則攘臂而扔之(즉양비이잉지)라.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하며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하고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이요 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하니라. 夫禮者(부례자)는 忠信之薄(충신지박)이며 而亂之首(이란지수)라. 

前識者(전식자)는 道之華(도지화)이며 而愚之始(이우지시)라. 是以大丈夫處其厚(시이대장부처기후)하고 不居其薄(불거기박)하며 處其實(처기실)하고 不居其華(불거기화)하나니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하나니라.>

높은 덕은 덕이 아닌 것 같아 진짜 덕이 있으며, 낮은 덕은 덕스러움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니 결국 덕이 없어진다. 높은 덕은 인위가 없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지만 낮은 덕은 인위적이라 억지스러워 보인다. 훌륭하다고 하는 인도 인위적이라 억지스러우며, 훌륭하다는 의도 인위적이라 억지스러우며, 훌륭하다는 예는 인위적인데다, 만약 사람들이 무례하면 팔을 비틀어대며 지키기를 강요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으며,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나오며,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다. 무릇 예라고 하는 건, 진정과 믿음이 얄팍한 겉치레이며 혼란의 우두머리다. 미리 앞날을 예견하여 안다는 사람도 도의 화려한 꽃일 뿐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물러 얄팍하지 않으며, 열매 속에 들어있지 꽃 속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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