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던 한강이 단양에서부턴 주춤거린다.
바다를 갈망하는 충청북도가 한강의 허리를 잘라 갖게 된 바다 같은 호수 충주호, 강물은 차례를 기다린다.
단양에서 충주는 물길만으로도 100리가 훌쩍 넘는다.
길은 온통 수몰의 흔적과 물을 피해 다시 똬리를 튼 산촌 곁을 멀미나게 넘나든다.
“월악산 영봉이 물그림자로 비치면 태평성대가 오리라”던 전설은 현실이 되었고, 우리네 삶은 누가 뭐래도 해도 이만큼 살게 되지 않았는가.
영험하기도한 조상님 전에 다시 한번 엎드려 국태민안을 빈다.
□ 충주호는 유역면적 6,648㎢, 저수용량 27억5천만㎡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친 국내최대 인공호수, 홍수조절, 수력발전과 각종 용수공급을 위한 다목적 댐이다.
구단양, 신단양도 옛 이름 되어
휴가철의 단양은 차를 타고서는 긴 꼬리를 물고 서 있어야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물론 고속도로나 우회국도로 휘익 지난다면 어디가 단양인지 이정표를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저 강과 절벽 그리고 수풀 사이로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조감이 전부인 듯 느껴진다. 충주댐이 건설되고 원래 단성면 상방, 하방, 북하리 일대에 있던 단양읍이 온통 밤나무 밭이던 상진리, 도전리 일대 32만평의 언덕배기로 새로 이주한 것이 1985년이다. 삶이 바뀌었다. 시골 소읍에서 2,500세대가 이주하면서 수세식 변소와 상수도가 들어선 신도시가 건설된 셈이었으니 수몰의 안타까움은 새 삶의 기대와 범벅이 되었음직하다. 여정에서 수몰의 이야기와 그 편린들은 넘치고 넘칠 테니 접어두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단양관광호텔과 상진대교를 끼고 접어드는 강섶 길은 옛 철도의 노반이자 흔적이다. 충주댐까지 어디도 엄밀해 말해 강둑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강물을 발아래 보면서 산허리에 걸린 길이니 오히려 산길이 맞다. 읍내가 통째로 이주하는데 철길이라고 제자리에 앉아있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드는 스카이워크가 단양에도‘ 만천하스카이워크’라는 이름으로 강변에 새로 들어서 여름철에는 유달리 북새통을 이룬다. 매포터널을 비롯한 두 개는 아예 입구에서 신호를 자동검지하게 되어있다. 더러 시원찮은 터널은 잡초 우거진 폐광처럼 입을 벌리고 있고, 수양개 나루쯤에는 교각 하나가 서 있어 옛 철길의 흔적을 말해준다. 가을 양광이 따갑게 느껴져도 이끼터널에 들어서니 그 삽상한 바람은 아무데서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양개마을 사람들이 물속에 잠기는 고향집의 위치를 오석에다 새겨 길섶에 세워 두었다. ‘이타관, 차봉근, 김중년, 주문상, 곽은종........’ 각성바지 들이 사이좋게 살았던 강나루 수양개는 서낭당 느티나무 두 그루와 함께 용궁의 영토가 되었으니 얼마나 그리우랴. 한적한 길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무료함은 미리 읽어둔 단양의 옛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단양이라는 이름의 원적은 단성이니 군청이 단성에 소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물 한 방울 흘러넘칠 데 없는 골짜기 한강 물은 몇 년 만에 반복을 거듭하는 홍수에 시달렸다. 단성면 하방리에 있던 군청은 1972년 대홍수를 맞고 상방리로 고도를 높여 이사했지만 신단양건설로 다시 옮겨야 했다. “충주댐이 건설되면 도담삼봉 허리까지 물이 찬다.”는 말이 떠돌았지만 그건 장마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댐 수몰이 아니더라도 철도든 고속도로든 쌩쌩 달릴 수 있도록 까마득한 하늘에 교각으로 떠받치고 건설하는 터이니 신단양으로 이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그나마 세월이 흐른 탓일까 신단양이란 이름은 어느새 그냥 단양이 되고 말았다. 새신랑이 어느새 주름진 중년이 되어 버리듯.
신라와 고구려의 싸움터, 단양
큰 강과 천길 벼랑이 곳곳에 있으니 단양이 천연의 요새였음은 당연하다. <단양신라적성비>라면 몰라도 국보(198호)라니 눈이 번쩍 뜨인다. 단양대교에서 올려다 보이는 곳 좀 더 쉽게 말하면 중앙고속도로 단양상휴게소 뒤편에 있다. 1978년 단국대 학술조사팀이 발견했으니 그때까지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면서도 몰랐던 보배다. 신라 진흥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척경비다. 전체 430자 중 284자만 판독이 가능하나 억지로 유추해도 305자에 그친다. 새로 이 지역을 개척한 지역유공자의 공적을 기리고 신라에 충성할 경우 포상하겠다는 선언비인 셈이다. 자전거 여행은 온전히 육신을 놀려야 하니 샛길로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경우는 다음을 기약하자는 스스로의 유혹에 약하다는 게 맹점이다.
나 또한 척경비는 전기자전거 시대의 먹거리로 남겨 놓고 지나친다. 단성면 소재지를 지나면 꼼짝없이 충주로 가는 36번국도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중방리 쑥고개와 외중방의 제비봉 비탈로 난 언덕을 오르는 제법 뻐근한 코스가 장회나루까지 이어진다. 자전거를 깔보는 자동차의 오만도 참고 견뎌야하니 제대로 산천 구경하는 건 접어두고 다리근육에 정신을 집중할 일이다.
충주호 유람의 종점, 장회나루
충주댐에서 출발하면 장회나루가 물길의 종점이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단양을 만들면서 유람선의 종점도 당연히 신단양이었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물 사정은 물이 풍부할 때를 빼고는 장회나루까지만 물길을 허락했다. 단양-충주댐-월악산-수안보-화양계곡-속리산-대청댐-대전을 연결하는 충청내륙 의 거대한 관광벨트 청사진 아래 신단양 사람들도 들떴으나 그건 기대일 뿐이었다. 소양호의 경우도 군축령 아래 인제선착장까지는 못 가는 날이 더 많았고 신남선착장이 종점이 되고 말았던 것과도 흡사하다. 더구나 외중방리에 단양수중보 건설로 이제 단양읍내로 유람선이 들어올 일은 더더욱 없어졌지만 도담삼봉은 허리까지 늘 물주머니를 차고 단양은 ‘물의 도시’다워졌다. 장회나루는 천혜의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단양 8경에 들어가는 구담봉(367m), 옥순봉(283m)이 받쳐준다. 유람선에 오른 관광객들은 거대한 기암절벽을 치켜 보느라 고개가 아프다. 원대리에서 옥순대교로 건너는 이정표는 이제 다소 느긋한 강섶 길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고만고만하게 유순한 길을 한동안 달려갈 수 있어 기쁘다. 홍시빛 트러스트교인 옥순대교는 암록의 배경으로 더욱 빛난다. 충주호의 타는 가을 단풍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그 절경의 절정에 바로 옥순봉 이 있다. 조선 선조때 이지번이라는 사람이 삭도를 설치하여 가마를 이동하였다는 얘기가 전설치고는 꽤 구체적으로 전해 내려온다. 아닌 게 아니라 옥순봉에서 건너편으로 가로질러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면 이번에는 아름다운 계곡의 물빛을 내려다보느라 코가 빠져도 모를 지경이겠다. 상천리 친환경 민속마을을 지나면 능강계곡 언저리에 능강솟대문화공간과 ES리조트가 잇달아 나타난다. 저마다 제 몫을 하겠지만 금수산(1,015m)신선봉 아래 매달린 듯 자리 잡은 정방사는 충주호와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빼어난 경치에 부처님도, 스님도 도를 닦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절집에서는 같은 스승을 모신 승려들을 도반(道伴)이라 부른다. 함께 구도의 길을 가는 동반자란 뜻이니 깊고도 깊은 뜻이다. 높다랗게 하늘가에 걸려 있는 절 얘기를 하는 것은 정방사 주지였던 상인 스님(현 음성 가섭사 주지)이 어디 도반에야 비할까마는 세속의 인연으로 나와 40년 가까운 우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서른 안쪽이던 그때, 김포로 가는 시외버스 뒷좌석에서 만나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김포경찰서 경비과장, 그는 북녘땅이 보이는 문수사 재무 스님이었다. 김포에서 자신의 생가를 어린이 공부방을 만들어 호기 있게 활동하던 한 시민운동가와 신부님, 목사님들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종교의 벽을 넘어 교우했다. 1982년 겨울 크리스마스에는 상인 스님이 교회에 서서 합장 예불을 하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설법을 하였으니 스님이나 목사님이나 정말 세상을 앞서 나간 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