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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37. 조화와 안정이 저절로 이뤄지다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37. 조화와 안정이 저절로 이뤄지다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19.09.03 15:13
  • 수정 2019.09.0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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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정현종 시인은 노래합니다. <방문객>이란 시인데요,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고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道家에서 人이 來하거든 客이 來하였다 言치 말고, 天主降臨하셨다 稱하라.”

동학 2대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제자들에게 주는 법설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동학을 믿는 집에 사람이 오거든 손님이 왔다고 말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는 겁니다. 정현종 시인이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한 이유는 해월의 법설을 빌리자면, 바로 ‘한울님’이 강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해월은 스승인 수운 선생이 대구 감영에서 참형을 당한 뒤 무려 36년간 도망자 생활을 합니다. 주로 경상북부와 충청도, 강원도를 오가며 생활하지만 더러 경기도나 호남을 순례하기도 합니다.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을 살기도 합니다. 깊은 산골에 숨어 살지만 더러는 들판이 보이는 마을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사는 집 뒤로는 두 개 이상 도주로를 확보해놓고 살았습니다.

해월은 이렇게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수만 명이 모인 보은취회(報恩聚會)와 수십만 명이 함께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온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면서도 동학교도를 어마어마하게 포덕(布德)한 것이죠.

1894년 12월 24일, 충청도 음성군 되자니에서 동학혁명이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뒤 해월은 몇몇 제자들과 함께 늙은 몸을 이끌고 도망을 다니게 됩니다. 강원도 인제, 원주, 충주, 음성, 상주를 옮겨 다니다 1897년 1월에 음죽군 앵산동으로 오게 됩니다. 앵산동은 현재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입니다. 이곳에서 해월은 매우 중요한 법설을 하게 됩니다.

1897년 4월 5일, 수운선생 득도일 제례를 지내면서 해월은 수제자 의암 손병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 벽을 향하여 신위를 베푸는 것이 옳으냐?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으냐?”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 이제부터는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나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향아설위’라는 법이 나옵니다.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나를 향하여 위를 세워야지 벽을 향해 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벽’은 한울님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음을 뜻합니다. 신이 밖에서 나를 지배하게 되면 나는 신의 종밖에 안됩니다. 한울님은 내 안에 있으므로 한울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이분법적으로 나눠지지 않고 이원화 되지 않은 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동학에서는 13자로 된 주문을 외웁니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인데요. 첫 번째 여섯 글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시천주(侍天主)란 천주 곧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며, 조화정(造化定)이란 조화(調和)와 안정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일체가 되면 조화와 안정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통나무처럼 순수하게 무욕 상태가 되면 고요한 마음으로 스스로 조화롭게 변화하고 스스로 안정이 되어 평화롭게 된다.”

저절로 변화하고 저절로 안정되는 것을 ‘자화(自化)’와 ‘자정(自定)’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자화와 자정이 이루어진 상태가 동학의 주문에서 말하는 ‘조화정(造化定)’인데요, 조화정이 이루어지려면 한울님을 내 안에 잘 모셔야 합니다.

한울님을 내 안에 잘 모신다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유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바로 노자의 도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절로 그런 상태, 그것이 무위자연인 것이죠.

무위자연으로 가는 길을 저는 우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현종의 시처럼, 해월의 법설처럼, ‘나에게 오는 사람을 한울님으로, 어마어마한 일로 받아들이는 일’ 이라고. 그렇게 하다보면 나 스스로 변화가 일어나 조화롭게 되고 스스로 안정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노자 도덕경 37장 : 道常無爲(도상무위)이나 而無不爲(이무불위)라.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이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라. 化而欲作(화이욕작)이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하리라. 無名之樸(무명지박)으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하리니 不欲以靜(불욕이정)하여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하리라.>

도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된다. 만약 지배자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변화하리라. 스스로 변화되는데도 욕망이 또 일어난다면 내가 ‘이름 없는 통나무’로 어루만져 진정시킬 수 있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마침내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욕망이 사라지면 고요하게 되어 온 세상이 스스로 안정을 찾아 평화로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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