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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세종, 뜻밖의 잔혹사 ‘도둑과의 전쟁’

성군 세종, 뜻밖의 잔혹사 ‘도둑과의 전쟁’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19.09.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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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출신 조병인 박사에게 듣는 세종대왕의 형사정책

재위 32년 막바지 3년 동안 강·절도범 468명 처형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지내고, 세종의 형사정책에 관한 전문가로, 경청리더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병인(65세) 박사를 만나보았다. 여주 출신인 조박사는 세종이 보위에 있으면서 자비와 인정에 기초한 온정주의 형사정책을 펼치려다가 숱하게 고생한 행적을 최초로 심도 있게 파헤쳤다. 그 결과로 뜻밖에도 세종이 재위 중반 이후로 ‘도둑과의 전쟁’에 휘말려, 죄수들을 무더기로 처형한 충격적 ‘잔혹사’를 밝혀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이 겪은 ‘통치자로서의 고뇌’와 시행착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의 사법 당국자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소중한 교훈이 있다는 것이 조박사의 주장이다.

Q. 형사정책연구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한다고 들었는데, 드문 사례 아닌지?

1989년 7월 1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처음 개원할 때에 제가 가장 먼저 들어갔지요. 연구직 공채 1기로 임용된 5명 가운데 최고선임으로 복무하다 5년 전에 정년을 맞았습니다. 26년을 재직하면서 마약범죄와 조직폭력 연구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연구실장, 연구부장, 기획조정실장, 연구·경영국장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연구원에 재직하는 동안 모교인 동국대학교의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로 임용되어 형사정책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현재는 법무부 인권 강사로 위촉되어 있습니다.  

Q. 여주 출신으로 아는데, 이곳에서 있었던 소년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조병인 박사 맞습니다. 가남면 송림리에서 태어나 금당초등학교(22회), 장호원중학교(16회)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가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게 되었지요.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학교 대표 축구선수로 출전해 경찰서 운동장에서 오학초교 팀에게 패하고 코치 선생님에게 혼이 났던 일이 생각나네요. 저의 부친(조동운)이 여주지역 초등학교에서 38년간 교편을 잡으시다 점동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셨는데, 부친을 따라서 영릉과 신륵사를 갔었던 일들도 아련히 생각이 납니다.

Q. 한국공안행정학회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어떤 조직인지?

조병인 박사 형사정책연구원 재직 시에 2년간 맡은 적이 있지요. 전국의 경찰행정학과 교수와 대학원생 약 3백여 명이 회원의 회비를 모아서 논문집도 내고 학술행사도 하는 순수 학술단체입니다.

Q. 어떤 계기로 세종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나?

조병인 박사 저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우발적 폭력’ 뒤에는 ‘지독한 불통’이 있고,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성숙한 ‘경청’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래서 세종의 경청 자세를 배우려고 세종실록을 반복해 읽다가 전공을 살려서 세종의 형정(刑政) 행적을 파헤쳐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소장 박현모 교수)가 주관한 ‘세종실록 강독회’에 동참해 열심히 세종실록을 읽었고, 이후에 여주대 학부와 평생교육원에서 세종의 리더십에 대해 강의도 하고, 어쭙잖게 『세종식 경청』과 『세종의 苦(고): 대국의 민낯』이라는 저서도 냈습니다.

Q. 세종에 대한 강의와 논문발표도 자주 하시는지.

조병인 박사 경찰, 검찰, 교정기관, 대학교, 연수원, 인재개발원, 군부대 등의 인문학 강좌에서 ‘세종의 성공비결’과 ‘세종의 사법개혁’ 등을 강의합니다. 3년 전부터 종로문화재단의 세종인문학 강좌에서 세종강의를 해왔고, 올해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세종학강좌와 한국정치학회 한국학국제학술대회에서 세종의 외교정책과 사법개혁에 대한 논문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최근에는 ‘황제에게 바쳐진 다섯 처녀의 비극’에 관한 논문을 완성해 한 학술지에 투고한 상태입니다. 그밖에도 오는 한글날에 맞춰서, 세종의 성군 자격을 터무니없이 부정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에 대한 반론서를 몇 사람과 공동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세종 공부에 전념하게 된 것은 운명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Q. 운명이라는 말이 재미있게 들리는데.

조병인 박사 여주 사람으로서 세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구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종께서 54세에 세상을 뜨셨는데 제가 1954년생입니다.(웃음)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간된 것이 1446년 병인년인데, 제 이름이 ‘병인’ 아닙니까.(웃음). 게다가 돌아가신 제 어머님의 성씨가 ‘이씨’였는데, 본관이 여흥이시니, 운명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요?

Q. 세종의 <휼형교지>에 대한 연구가 눈길을 끄는데, 세종이 고생을 많이 했을 듯 합니다.

조병인 박사 잘 아시듯이, 세종은 즉위하면서 어진 정치를 다짐하고 국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법행정 분야에 수사를 빙자한 고문 남발, 유전무죄 무전유죄, 재판거래, 사법농단 같은 고질적 적폐가 끊임없이 불거집니다. 심지어는 많은 국민이 대표적 청백리로 알고 있는 황희 정승이나 맹사성 같은 이들도 살인범 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설상가상으로 12년째 해에 고문치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13년째 해 6월에 마침내 장문의 <휼형교지>를 내립니다. 그 골자는 형정담당 관원들에게 <형벌을 조심해서 쓰라>고 간곡히 호소한 것인데, 이후로도 사법 적폐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세종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지요.

Q. 휼형(恤刑)교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는지?

조병인 박사 교지의 길이가 매우 길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는 관원들의 마음가짐을 제시한 <옥송 수칙 8가지>입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육백 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검찰, 경찰, 법원의 공무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1. 정밀하면서 사심이 조금도 없게 마음을 비워라. 2.자신의 의견이나 평소 생각에 치우치지 말라, 3.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 4.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부화뇌동하지 말라. 5. 오래된 인연이나 연고에 얽매어 머뭇거리지 말라. 6. 피의자가 빨리 자백하였다고 기뻐하지 말라. 7. 사법절차가 속히 종결되기를 기대하지 말라. 8. 여러 방면으로 따져보고 되풀이하여 답을 찾아보라. 그대로 발췌해서 오늘날의 형사, 검사, 판사들에게 똑같이 가르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Q. 왜 세종은 초기에는 요지부동으로 ‘엄벌주의’는 안 된다고 했는지?

조병인 박사 아버지 태종의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가의 형벌권이 궤도를 벗어나 백성의 삶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형벌로 인하여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을 품는 백성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지요, 재위 초반부터 형벌을 담당하던 관원들의 지나친 고문이나 죄수 학대 같은 실상을 세종이 잘 알고 있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Q. 세종시대에 ‘도둑과의 전쟁’을 벌이고 사형과 같은 극약처방이 있었다는 것이 의외인데, 왜 세종은 재위 막바지에 과격한 정책을 펼친 것인지?

조병인 박사 한마디로 말하자면, 즉위하면서 다짐한 ‘어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비와 인정에 기초한 온정주의 형사정책을 펼친 결과로 도둑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나라의 치안이 붕괴되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절도3범은 사면과 상관없이 교수형에 처하던 것을, 사면령을 내리면 이전의 범행은 전과에서 제외하기로 정책을 바꾸고서, 가뭄 등을 이유로 자주 사면령을 선포하다가 일이 그만 꼬여버린 것이지요. 그렇지만 세종은 상습절도범들을 어떻게든 죽이지 않으려고, 외딴섬 안치, 자자(刺字), 단근(斷筋), 경면 등을 시행케 하였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도둑들의 기세가 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상습범들은 사면이 있어도 사형에 처하게 한 것이지요.

Q. 자자, 단근, 경면 같은 형벌은 어떤 식으로 집행을 하는 것인가?

조병인 박사 자자는 팔뚝이나 손목에다가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것이고, 단근은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근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뇌물을 받고서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하거나, 힘줄을 끊지도 않고서 끊은 것처럼 속여서 8년 만에 폐지되었지요. 경면은 얼굴에다가 소도둑, 말도둑 하고 먹물로 글자를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져 도둑이 줄어들 것으로 믿은 것인데, 도둑들은 주로 밤중에 활동 하니까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Q. 도둑들을 외딴 섬에 유폐시키기도 했다던데, 조선판 빠삐용이었던 것인가?

조병인 박사 그렇습니다. 절도 범죄를 2회 혹은 3회 이상 저지른 자들을 전라도의 자은도, 암태도, 진도, 거제도 등지에 격리시켰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도둑들이 사고를 자주 저질러서 평안도와 함길도의 삼수와 갑산 같은 변방 오지의 관정 노비로 보내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지요. 그런데 섬이나 오지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이나 현지에 도착한 뒤에 몰래 도망쳐서 다시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Q. 여담이지만, 곤장 100대를 맞고도 목숨을 부지한 도둑이 있었을까?

조병인 박사 대개는 곤장 1백대를 맞으면 장독이 올라서 절반 이상이 곧바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활한 도둑들은 곤장형을 지능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절도 초범은 법정형이 곤장 60대였는데, 수사 과정에서 곤장을 맞는 고문을 당했으면 맞은 횟수를 형량에서 빼주는 점을 교묘하게 악용한 것이지요. 당시의 법이 고문을 하더라도 매질을 30회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있어, 도둑들이 30회씩 두 차례의 매질을 견디면서 자백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전과를 빠져나가기도 했지요.

Q. 강도는 초범이라도 참수형에 처했다고 하던데, 그렇게 해서 강도가 줄었나?

조병인 박사 강도는 초범이라도 사형에 처한 것은 사실이나, 강도가 줄었다는 통계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Q. 예조판서와 형조판서가 사형을 건의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조병인 박사 당시는 소나 말을 훔치는 범죄가 매우 많았습니다. 달리 훔칠 만한 물건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우마절도는 소위 ‘가성비’가 대단히 높았기 때문입니다. 식량은 훔치려면 지게로 지고가야 하지만 소나 말은 고삐만 풀어서 방향만 잡아주면 제 발로 걸어가지요. 또, 소나 말은 헤엄도 잘 쳐서 강을 건너는데도 문제가 없지요. 게다가 당시는 명나라의 요구로 태조 때부터 전국의 소와 말을 모조리 모아서 억지로 수출하는 바람에 우마의 씨가 마르고 가격이 폭등해서, 소나 말을 훔쳐서 남에게 팔거나 몰래 도살하여 고기, 내장, 뼈, 가죽 등을 팔아서 떼돈을 벌려는 도둑이 많았던 것이지요. 마치 오늘날의 마약사범들처럼요.  

Q. 세종 재위 29년부터 31년까지 3년 동안 도둑들이 무더기로 처형되었다던데.

조병인 박사 세종 재위 28년까지는 연평균 50명 안팎이 처형되다가 막바지 3년간은 매년 180~25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희대의 잔혹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도둑들이 계속 준동하여 세종 27년 7월에 다시 중벌주의를 복구하여 도둑들이 잔뜩 겁을 먹었는데, 바로 다음 해에 왕비가 죽어서 사형집행이 정지되자, 도둑들이 다시 활개를 칩니다. 심지어는 왕비 능 재실의 제기들을 훔쳐 가고, 도둑들이 관원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 의혹까지 불거지자, 세종 29년 5월에 우마절도는 2범부터 사형에 처하도록 법을 바꾸어서 반전을 시도합니다. 이처럼 중벌주의가 복원되면서 온정주의 기간에 전과가 잔뜩 쌓인 도둑 468명이 붙잡히자마자 목이 베이거나 교수대에 매달리는 참극이 빚어진 것이지요.  

Q. 그와 같은 역사기록은 세종의 성군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데, 오늘날의 사법당국에 어떤 교훈을 주는지?

조병인 박사 누가 뭐래도 세종은 위대한 왕이었지만 지나치게 신격화된 측면이 있어요. 너도나도 세종의 화려한 업적만 내세우고 실수나 착오에 대하여는 아무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세종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려면 찬란한 발명이나 창작의 성과보다 판단을 잘못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행적을 더 깊이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부끄럽게 생각되는 역사도 여과 없이 들춰야지 진짜배기를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성공의 부모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세종의 ‘온정주의 형사정책 실험’은 비록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어도, 오늘날의 경찰, 검찰, 법원의 당국자들이 혁신의 길을 모색하는 데에 더없이 훌륭한 타산지석이 되리라 밉습니다.

Q. 왜 지금까지 그런 충격적 역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조병인 박사 국가시험의 필수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국의 법과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이 우리 고유의 형사정책을 외면해왔기 때문이지요. 선택과목으로 형사정책을 가르치는 경우도 서양의 형사정책 일색이고, 배울 점이 아주 많은 전통식 형사정책의 진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실정이지요. 그래서 제가 작심하고 파헤쳐본 것인데, 이번에 발표한 논문은 제가 세종실록에서 찾아낸 여러 개의 ‘숨은 그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Q. 최근 경찰청 지휘부를 대상으로 이와 관련된 특강을 하였는데, 그 배경은?

조병인 박사 제가 금년 6월에 “세종 시대 ’도둑과의 전쟁‘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형사정책연구>에 발표한 직후에, 마침 경찰청으로부터 총경 이상 간부들이 참여하는 ’경찰을 바꾸는 시간(경바시)’에 자유 주제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그 논문을 “세종의 온정주의 형사정책 실험: 육백 년 전 X-파일 최초공개”라는 제목으로 간추려서 1시간 동안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영상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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