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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막과 얼음이 있는 사거리

그늘막과 얼음이 있는 사거리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19.09.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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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 아래 사거리 그늘막, 배려행정 피부로 느껴

참외 맛이 변한다는 처서가 지나갔다. 섬돌 밑에서 울던 귀뚜라미가 방충망 아래에서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서럽게 울어댄다. 대낮에 정수리에 와닿는 뜨거운 열기가 아직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정점을 지나 풀이 죽어간다. 작년 더위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우리 일상을 되돌아본다.

사거리마다 대형 그늘막이 들어섰다. 하오의 땡볕 아래 보행자에게 신호를 지키라는 건 무리한 요구임이 틀림없다. 이 상황을 재빨리 이해한 가운데 들어선 대박 아이템이 대형 그늘막이다. 대도시 몇 군데 설치되더니 올해는 무려 전국 5600여 개소에 설치되었다 하니 눈높이의 일치가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여주에도 간선도로 여기저기 그늘을 만들어 놓고 시민을 기다린다. 그늘 안과 밖의 체감온도 차이가 거의 20도에 육박하고, 실제도 7도 이상 차이가 난다니 고마운 그늘이다.

차량으로 포위된 ‘교통섬’에서 우리는 위로 받는다. 이 초대형 양산은 임금님이나 원님의 행차에 따라붙는 일산(日傘)같기도 하다. 그늘을 활짝 펴들고 시립(侍立)하고 있는 몸종처럼 우리를 반기니 우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순간 세금 낸 보람이 절로 느껴진다.

시민이 공감하는 제도나 시책은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누가 권하고 말고 할 게 없다. 마케팅 중의 최고의 마케팅이 바로 ‘입소문 마케팅’ 아닌가.

지난해 8월 고도(古都) 전주를 방문했다. 전주는 ‘전주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판소리와 서예 문화 등 호남의 풍류가 느껴지는 도시다. “영남에 안동이 있다면 호남에는 전주가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여름의 땡볕은 정수리를 쩍 갈라놓을 듯한 뙤약볕의 맹폭이었다. 사람들도 혀를 내놓고 걸을 지경임에도 사거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얼음덩어리는 조금씩 땀을 흘리기는 해도 꿋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엔 저밖에 믿을 것이 없죠?”라는 애교 섞인 자신감으로 전주시민과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얼음이 땡볕에도 쉬이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서울의 동빙고와 서빙고는 이름으로 현존하는 내력을 짐작이야 하지만 신뢰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 솔직하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신분과 용도의 차이로 얼음 채취 구역이 나뉘었고, 얼음의 이권이 대단하여 얼음 계(契)에 소속된 장사치들만이 독점적으로 채취할 수 있었다. 한강의 얼음이 가장 단단하게 어는 1월에 톱으로 잘라서 우마차에 실어 가마니로 잘 싸서 석빙고에 보관하면 그해 한여름에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더위 속에서 이해되었다.

2016년부터 3년 연속, 10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도시답게 살가운 환대를 보이니 무더위조차 관광의 한 부분이 된다.  

사거리에서 맞아주는 얼음에 벌겋게 달궈진 볼을 갖다 대면서 행정의 섬세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살갗으로 느낀다.

관치행정의 오랜 역사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구석구석 디테일이 점차 진화하고 있다.

‘한 표의 위력’과 자치단체 간의 경쟁이 유감없이 입증되는 사거리 그늘막 아래서 신호대기 중이나마 잠시 더위를 식히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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