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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떻게 봐야 하나?
여주신문 편집국장

1945년 패망한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유튜브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성한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처참한 모습과 대부분 여성인, 살아남은 민간인들이 파괴된 건물잔해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벽돌을 골라 줄줄이 서서 나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민간인과 군인을 통틀어 18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거의 전 세계와 싸운 독일이 420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에 비하면 소련의 전쟁피해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리우드와 서방 영화사들에 의해 미국과 영국이 전쟁의 중심국가였다고 흔히 착각하게 되지만 일부 전쟁역사가들은 2차 대전은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민간인을 포함한 2차 대전 사망자가 프랑스가 56만 명, 영국이 46만 명, 서쪽에서 일본과 동쪽에서 독일과 싸웠던 미국이 29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소련이 당한 나치독일에 대한 피해와 그들이 가졌을 적대감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자신들의 동포를 1800만 명이나 사망하게 한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격하게 된다.

나치는 끝까지 저항했다. 어린 유겐트 소년병들에게 마지막까지 판저파우스트를 쥐어주며 전차와 상대하게 했다. 지하철과 모든 건물에서 저항했고 마지막 남은 제국의회 의사당 건물에서도 치열하게 맞섰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치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베를린 지하벙커를 지킨 히틀러와 추종자들은 자살로 사라진다. 베를린에서만 독일군과 민간인 4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소련은 처절하게 복수했다.

독일에서 나치즘이 사라진 것은 프로이센의 수도로 역사의 중심이면서 나치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의 파괴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죽음 때문이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네 나라가 영토도 나누었다. 나치즘은 이러한 인적청산과 다시 복구할 수 없도록 철저한 물적 청산과정을 거쳤다.

일본도 독일과 함께 2차 대전 추축국이다. 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극심한 피해를 안기며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했다. 독일에게 나치즘이 있었다면 일본은 천황제와 신도(神道) 그리고 육군과 해군, 재벌이 결합된 군국주의 파시즘이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패전한 전범국가로서 독도 문제, 교과서 문제 등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배상과 보상의 과정을 통해 이웃국가와 화해를 이뤄야 함에도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에 전쟁범죄자들을 추모하러 정치인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는 저들의 심리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의문이 갈 때가 많다.

일본은 미국 페리제독에게 개항을 한 후 다시 미국에게 원자폭탄을 맞고 졌다. 비록 두 개의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지만 독일이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에 당한 피해를 생각한다면 그들은 전범으로 처벌 받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처벌을 거의 받지 않은 셈이다. 오히려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일본은 대한민국에게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련에게도 마찬가지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들도 모두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일본에게 져서 쫓겨났었다. 오직 일본은 미국에게만 졌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진 것이 잘못’이라는 태도다. 남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한 사죄를 하는 양심 있는 일본인은 소수다. 대부분 원자폭탄 때문에 져서 억울하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와 1급 전범이던 기시 노부스케를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 둔 아베총리의 관념이고, 일본 정치엘리트들의 생각이다.

일본은 핵폭탄을 2발 맞았지만 베를린처럼 철저하게 인적청산이 되지 않은 전범국가다. 그들의 전쟁이념이 그대로 살아있고 전쟁범죄자들이 다시 살아나 떠들고 있다.

이번 아베의 경제제재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을 지키기가 참 힘들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인간’의 품성을 갖지 못한 이웃에게까지 이롭게 해야 할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그리고 서로 돕고 사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제대로 서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것과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교훈을 다시 살펴봐야 할 때다.

박관우 기자  pkw39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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