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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9.07.0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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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진심을 다해 사랑해도 돌아보지 않는다

장주식 작가

두 친구가 산책을 갑니다. 바람 솔솔 부는 언덕에 앉아 잠시 쉬면서 차도 나눠 마십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난 요즘 고민이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A에게 들이는 공은, 정말 내 진심이잖아.”

“그렇고말고. 잘 알지. 근데 무슨 고민인가?”
“근데 말이야. A가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 그것 참 왜 그럴까. 그 얘길 듣다보니 나도 비슷한 고민이 하나 있네.”

“말해 보게.”

“내가 대표로 있는 모임에서 얼마 전에 예멘 난민을 도왔잖아. 우리나라에 정착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다했지. 근데 말이야. 내가 예멘 여성에게 히잡을 좀 벗으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가 한방 먹었어.”

“왜?”

“이렇게 말하더라고. ‘이건 제 정체성이에요. 히잡을 벗으면 제 일부를 잃는 거나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섭섭합니다.’ 하면서 불쾌해하더라니까. 나는 취직을 시켜주려고 좋은 마음으로 권했는데 말이지. 소개하려는 직장 사장이 히잡을 벗고 와야 된다고 하잖아.”

“허허. 그랬군. 선의로 대했지만 그게 다 통하는 건 아닌 모양이야.”

내가 두 친구 옆에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건 고민거리가 아니에요. 당연한 이치입니다.” 라고요.

우선 우리들 부모님을 한 번 봅시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잘 키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정성을 쏟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던가요? 오히려 더 주지 못해 늘 미안해합니다. 이런 부모에게도 자식은 되갚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위 두 친구를 보면 겨우 몇 가지 베풀어 놓고 바라는 건 오지게도 많은 것이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겉으로도 드러날 텐데 과연 누가 고마워할까요. 고마움은커녕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예멘인에게 히잡을 벗으라는 건 예전 구한말 때 조선 선비에게 강제로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단발령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갖고 있는 관습이 있고 문화가 있는 것이죠. 스스로 관습과 문화를 바꾸지 않는다면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떤 이유로도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자는 역시 해답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세상은 ‘신령스러운 그릇’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신령스러운 그릇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두 친구 얘기에 빗대어 보면 A나 예멘 여성은 신령스러운 그릇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신령스러운 그릇을 가지려고 들면, 그러니까 A나 예멘인에게 신뢰를 얻거나 보답을 받으려고 들면 그건 될 턱이 없다는 겁니다. 신령스러운 그릇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므로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앞서나가기도 하고 뒤따라가기도 하고, 스스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스스로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스스로 굽히기도 하고 상대를 무너뜨리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서라고 한다고 앞서고 뒤에 서라고 한다고 뒤에서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내가 그런 존재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과대망상입니다.

따라서 두 친구가 마음에 평화를 얻으려면 이 세 가지를 지키면 됩니다. 첫째 기대를 버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기대란 보답을 바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그 순간, 바로 그건 상대방에 대한 강요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치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사치란 ‘크고 많다’는 뜻이죠. 많은 물건과 큰 물건을 받으려는 마음이 사치심입니다. 물론 언어 사치도 있지요. 사랑한다, 고맙다, 존경한다와 같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곧 언어사치심입니다. 셋째 큰체하는 마음을 버리는 일입니다.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말이죠. 이 마음을 갖는 순간 자신을 드러내려하는 욕망 때문에 조그마한 빛이라도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고 깜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말처럼 쉽겠어요. 날마다 두 친구처럼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기 십상이지요. 그렇더라도 그런 고민스런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노자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지 싶습니다.

<노자 도덕경 29장 :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하면 吾見其不得已(오견기불득이)라. 天下神器(천하신기)로 不可爲也(불가위야)이니 爲者敗之(위자패지)하고 執者失之(집자실지)하리라. 故物(고물)은 或行或隨(혹행혹수)하고 或歔或吹(혹허혹취)하며 或强或羸(혹강혹리)하며 或挫或隳(혹좌혹휴)라. 是以聖人(시이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하니라.>

장차 천하를 가지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람은 내가 보기엔 천하를 얻지 못하고 말 것이다.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라 뭔가 애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억지로 애를 쓸수록 실패하고 움켜잡으려고 하면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흥겹기도 하며 세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꺾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따라서 성인은 심한 걸 버리고 많은 걸 버리고 큰 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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