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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9.06.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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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갓난아이와 통나무는 평등하다

장주식 작가

인간 세상이 평등하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사람살이에는 온갖 차별이 난무합니다. 신분차별, 남녀차별, 성적차별, 지위차별, 빈부차별, 지역차별. 세다 보면 한이 없지요. 사람은 사람끼리 차별을 넘어서 다른 생물도 차별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이 차별을 넘어서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대칭성회복이라고 하는데요, 대칭성이란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이런 신화가 있습니다.

<시베리아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니브히족 남자가 사냥하러 숲에 들어갔다. 곰 발자국을 따라 가다가 어떤 굴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굴속에는 큰 집이 있고 사람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남자는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지낸다. 어느 날 굴속 사람들이 의논을 한다.

“오늘 하류지역 사람들이 먹을 걸 가져온다. 우리 중 누군가 손님으로 내려가야 한다. 누가 가지?”

선뜻 가려는 사람이 없자 잠시 뒤 한 여자가 말했다.

“내가 내 친구와 함께 손님으로 내려가기로 하지.”

여자는 털가죽 한 장을 집어서 걸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순식간에 곰이 되었다. 여자가 친구라고 부른 니브히족 남자와 곰이 된 여자가 굴 밖으로 나왔다. 니브히족 사냥꾼들이 곰이 된 여자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신화는 훨씬 더 길지만 요점만 간추려 봤습니다. 중요한 건 여자가 털가죽을 걸치자 곰이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물론 털가죽은 곰 모양이겠지요. 바로 인간과 곰은 같다는 생각을 이 신화는 전해줍니다. 단지 어떤 털가죽을 걸쳤느냐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과 동물은 대칭이라는 겁니다. 이 생각이 확장되면 인간과 강아지, 인간과 지렁이, 인간과 상추, 인간과 소나무가 하등 다를 바 없는 대칭성을 가집니다.

대칭성 반대편에 비대칭성이 있지요. 비대칭성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을 차별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높고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고 인간이 개구리보다 귀하다는 등, 이런 비대칭성은 곧 불평등의 기원이 됩니다.

노자도 비대칭성을 갖게 만드는 분별심을 넘어서라고 주문합니다. 세 가지를 예로 드는 데요 남성과 여성, 흑과 백, 영광과 치욕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분별하고 차별하게 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분별을 넘어서면 아주 멋진 경지에 도달합니다. 남성 속에 여성, 여성 속에 남성이 있음을 알고 행동도 자연스럽다면 마치 갓난아이처럼 됩니다. 갓난아이는 너무나 부드럽고 잘 웃습니다.

흑과 백의 분별을 넘어서면 무극(無極) 곧 극단성을 갖지 않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어느 한쪽만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고집이 사라지는 것이죠. 영광 속에 치욕이 있고 치욕 속에 영광이 있음을 알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면 마치 통나무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통나무는 소박하고 순수함을 뜻합니다. 통나무는 아직 쪼개지기 전이지만 쪼개지면 어디에든 다 들어맞는 그릇이 됩니다.

여기서 나는 갓난아이에게 주목하고 싶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인간정신이 발달하는 3단계로 낙타, 사자, 어린이를 말합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사자는 “아니!”라고 외치며 부정할 수 있는 혁명가이며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단계고요. 어린이는 “예! 좋아요.” 하고 무엇이든 긍정하며 놀이하듯 삶을 즐기는 단계입니다.

인간이 도달할 최고 경지는 어린이 단계라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어린이는 순진무구하고 새로운 출발이며 무한 긍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어린이 단계를 가집니다. 다만 어린이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리고 우리는 의식조차 잘 못합니다. 세 살 이전 어린이 시절이 노자가 상정한 갓난아이 단계라면 우리는 잃어버렸던 그 시기를 다시 회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당연히 노자도 복귀(復歸)라는 말을 씁니다. 갓난아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건, 노자에 따르면 어렵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서로를 품고 있다는 대칭성을 가지기만 하면 그 길은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자도덕경 28장 : 知其雄(지기웅)하고 守其雌(수기자)하면 爲天下谿(위천하계)하리니 爲天下谿(위천하계)이면 常德不離(상덕불리)하여 復歸於嬰兒(복귀어영아)하리라. 知其白(지기백)하고 守其黑(수기흑)하면 爲天下式(위천하식)하리니 爲天下式(위천하식)이면 常德不忒(상덕불특)하여 復歸於無極(복귀어무극)하리라. 知其榮(지기영)하고 守其辱(수기욕)하면 爲天下谷(위천하곡)하리니 爲天下谷(위천하곡)이면 常德乃足(상덕내족)하여 復歸於樸(복귀어박) 하리라.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하니 聖人用之(성인용지)하여 則爲官長(즉위관장)하리라.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이니라.>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세상에 시내가 되리니, 세상에 시냇물 되면 늘 덕이 떠나지 않아 갓난아이로 돌아가리라.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면 세상에 법식이 되리니, 세상에 모범이 되면 늘 덕이 어긋나지 않아 무극(차별 없음. 분별없음. 대칭성.)으로 돌아가리라. 영화를 알고 욕됨을 지키면 세상에 골짜기가 되리니, 세상에 골짜기가 되면 늘 덕이 만족스러워 통나무로 돌아가리라. 통나무는 쪼개지면 그릇이 되니, 성인이 이를 사용하여 지도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크게 만듦은 쪼개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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