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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인가?
이동순 목사(천송교회/여주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20세기 후반이 스위스 출신 내과 의사이며 가장 탁월한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 박사의 "고독으로부터 도피"라는 책에서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병은 참된 친교(親交)의 상실에 기인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인간의 그릇된 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첫째, 의회 정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회 정신은 건전한 민주주의 정신을 의미하지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닫고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정치적 복선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독립의 정신이다. 이것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셋째, 소유의 정신이다. 이것은 탐욕·욕심·허영·지배욕을 의미한다. 넷째, 요구의 정신이다. 이것은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데는 참된 친교(親交)의 정신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에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유형을 보게 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을 예루살렘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고 하며 현재 교회는 이 정신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교회공동체는 세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그 목적부터 다르다. 대부분 세속적인 공동체의 형성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인 것들이다. 어느 특정인의 신념, 이데올로기, 어떤 사람의 유훈(遺訓)이 기초가 되는데 여기서는 그것과는 달리 예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제자)들의 가르침이 기초가 되고 있다(사도행전 2장 42절).

세상의 생활 방식은 서로 많이 소유해 가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는 생활 방식이다. 그 친교를 가능케 하는 힘이 돈이나, 권력의 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관계이다. 그러한 것이 예수 안에서 서로 떡을 떼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그런 모습은 전혀 없고 가난한 자를 위해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예수의 사랑을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은 그 시대 사람에게는 너무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모두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들을 칭송(稱頌)하였다. 현실로 돌아와 말하면 오늘의 교회가 이 교회의 원조(元祖)와 사뭇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를 보고 교인들을 볼 때 전혀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 대신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교회의 지향점인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희망 가운데 있는 미래이고 세상 안에서 실현되는 미래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社會)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공동체이다. 얼마 전 고(故)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추모제가 그의 고향 봉하마을에서 있었다. 왜 그의 죽음을 매년 인산인해(人山人海)의 물결이 되어 애도하며 추모하는가? 그것은 바로 노무현 정신(精神)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정치가 성공적이었든 실패작이었든 그것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 깨닫는 것은 그 노무현 정신에 하나님의 나라가 담겨있다. 그가 늘 가면 방명록에 서명하는 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즉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사회, 권력과 부를 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준 노동자들이나 소외된 약자, 가난한 자들에게 그 권력과 부를 분배하는 사회이다.

예수는 이미 2000년 전에 그것을 말씀하시고 그 운동을 하시다가 당시의 기득권 세력에 모함받고 짓눌려 결국 사형틀인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정신이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주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그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絶對)화해서 거기에 얽매이면 안 된다. 갈등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며 원수와 적을 만들 뿐이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사찰에 가서 모두 머리를 숙이고 합장(合掌)하는데 유독 혼자 거부하고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황당해했다. 불교계는 분노했다. 그는 알다시피 전도사(傳道師)라 불리는 독실한 교인임을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다. 타 종교일지라도 예를 표하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불자가 교회에 왔다면 기도할 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예를 표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제이다.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겠는가? 어떻게 폭 넓은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상과의 진정한 교제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이 아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은 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데 있다. 오늘의 위기는 이 세상의 위기가 아니라 교회의 위기이다. 그 위기의 내용은 교회가 본질적인 그 아름다운 정신을 포기하는 데 있다.

여주신문  yeoju@yeoju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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