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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21. 황홀한 공덕(孔德)
장주식 작가

있다가 없어지면 황(恍)하다고 하고 없다가 생겨나면 홀(惚)이라고 합니다. 두 글자를 합치면 ‘황홀’이 됩니다. 밝음이 극한까지 가서 어두워지려고 어슴푸레한 상태를 ‘황’이라고 하고 어둠이 극한에 이르러 다시 밝아지려는 흐릿한 상태를 ‘홀’이라고도 합니다. 황홀은 결국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그런 상황입니다.

노자는 늘 ‘도’를 이야기 하는데요, 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황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니며 밝음과 어둠이 극한에 이르러 다시 어두워지거나 다시 밝아지려는 바로 그 순간, 그 어슴푸레하고 흐릿하며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그런 상황. 그게 도라는 것입니다.

도의 정의가 이러니 우리가 어떻게 도를 알겠어요. 그래서 노자는 도가 드러나는 장면에 주목합니다. 오늘 얘기하려는 ‘공덕(孔德)’도 도가 드러나는 주요장면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그럼 공덕은 어떤 장면인지 한 번 보도록 하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부자 중 하나라고 하는 경주최씨 가문을 이야기해 봅니다.

첫 번째 일화. ‘나는 무명옷을 입더라도 손님은 배불리 먹여라.’

최씨 가문에 시집을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한답니다. 하지만 집에 오는 손님이나 지나가다 묵어가려는 나그네에겐 진수성찬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최씨 가문이 거두는 한 해 소득 중 무려 절반을 과객 대접에 썼다고 하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두 번째 일화.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을 기르기 위한 공부는 하되 높은 벼슬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자신도 잃고 타인도 망칩니다. 진사 이상 나가지 않는 건 권력을 탐하지 말라는 가르침과도 같습니다. 그 속에 진짜 권력이 살아 있고 그것은 신뢰할만한 권위가 됩니다.

세 번째 일화. ‘농사짓는 사람에게 소득을 주라’

최씨 집안 땅은 소작인들이 서로 경작하려고 했습니다. 수확물 중 7~8할을 가져가던 보통 지주들과 달리 최씨 가문은 오히려 소작인에게 더 많은 수확물을 갖게 했습니다. 당연히 소작인들은 너도나도 최씨 집안 땅을 경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는 상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기업만 살아남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조선시대 지주들과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보다 더 강력한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사라진 토대위에서 결국 대기업인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네 번째 일화. ‘곳간을 열어 굶는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지어 입혀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이 되면 소작료를 깎아주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17세기에 살았던 한 최씨 종손은 임종 때 모든 차용증을 불태우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갚기를 바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엔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면서 가세가 기우는데,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은 교육기관에 기부합니다.

경주최씨 가문이 대대로 해 온 일을 보면 노자가 말하는 ‘공덕’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덕은 ‘비우는 덕’ ‘큰 덕’ 등으로 해석됩니다. 최씨 가문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끝없이 비워가는 덕을 가졌습니다. 결국에는 말끔히 비워버렸죠. 바로 노자가 말하는 ‘황홀’한 도가 공덕으로 드러났습니다.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심하고 상대적인 박탈감이 강한 시대엔 최씨 가문이 해 온 일이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조금 나눠 갖자는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란을 보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한 푼도 내놓기 싫은 마음이라면 ‘고르면 가난이 없다’라는 말이나 ‘골고루 평화’ 같은 외침은 허망할 뿐입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공덕동(孔德洞)은 큰 언덕이 많아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데요, 일리가 있습니다. 언덕이 크면 많은 사람이 기댈 수 있으니까요. 한편 ‘공(孔)’이란 글자는 아이가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순간만큼 편안할 때가 또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 누구나 기대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언덕이나 품은 과연 몇 개나 있을까요.

<노자도덕경 21장 : 孔德之容(공덕지용)은 惟道是從(유도시종)인데 道之爲物(도지위물)은 惟恍惟惚(유황유홀)이라. 惚兮恍兮(홀혜황혜)이나 其中有象(기중유상)하며 恍兮惚兮(황혜홀혜)이나 其中有物(기중유물)하며 窈兮冥兮(요혜명혜)이나 其中有精(기중유정)이라. 其精甚眞(기정심진)하니 其中有信(기중유신)이라. 自古及今(자고급금)에 其名不去(기명불거)하니 以閱衆甫(이열중보)라. 吾何以知衆甫之狀哉(오하이지중보지상재)리오? 以此(이차)이니라.>

공덕이 가진 넓은 품은 오직 ‘도’를 따르기에 그러하다. 도라는 물건은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황홀’하다 한다. 흐릿하고 어슴푸레하나 그 속에 모습이 있고 어슴푸레하고 흐릿하나 그 속에 실체가 있으며 그윽하고 어둑어둑하지만 그 속에 정기가 있다. 정기는 무엇보다 참되니 그 속에 믿음이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은 늘 있어왔으니 그것으로 뭇 존재(衆甫 : 존재의 시원)를 살펴 드러낸다. 내가 뭇 존재의 형상을 어찌 아는가? 바로 이 ‘도’ 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주신문  yeoju@yeoju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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