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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식모(食母), 자연의 섭리

20. 식모(食母), 자연의 섭리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9.04.1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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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올해 초에 종영된 <SKY 캐슬>이란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있습니다. 1%대 시청률로 1회를 시작해 후반에는 20% 이상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상류층 사람들 자식 대학보내기가 중심주제입니다. 첫 회부터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서울의대에 들어간 아들이 집을 나가고, 찾아온 엄마에게 ‘당신은 지금부터 내 엄마가 아니야. 지금부터 복수할 거야.’ 소리치고, 엄마는 자살을 하는 흐름이었죠.

잘 짜인 시나리오에 긴장감 넘치는 배우들 열연, 게다가 현재 우리 사회에 첨예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듯합니다.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부모들이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얻은 경험이 있어 더욱 그렇죠. 그러나 지금은 교육이 신분상승의 도구가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교육에 매달리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들이 파생하고 있습니다.

노자를 빌어 와서 현재 우리 교육문제 해결점에 대한 시사점을 좀 얻어 볼까요? 노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배움을 끊어라. 그러면 근심이 없다!>

자. 배우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군요. 그러면서 노자는 배운 사람과 배움을 끊은 사람이 보이는 모습을 대조합니다.

먼저 배운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진단합니다. 첫째 소, 돼지, 염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벌이거나 따뜻한 봄날 바람 좋은 곳으로 놀러가는 듯한 즐거움. 둘째 세상사에 넉넉하고 여유만만 함. 셋째 밝고 지혜롭고 눈치 빠름. 넷째 뭔가에 쓸모가 있고 재주가 있음.

하나같이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배움을 끊은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첫째 머뭇머뭇 거리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꼭 갓난아이가 웃을 줄도 모르는 것과 같음. 둘째 지치고 피곤하여 고달픈데도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모름. 셋째 어리석은 바보처럼 비실비실 거림. 넷째 세상사에 무디고 재주도 없어 초라함.

뭐 하나 볼만한 게 없군요. 누가 봐도 배우고 싶지, 배움을 끊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노자는 배움을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근심이 없어진다고요.

과연 노자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예.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 홀로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식모(食母)’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식모’에 주목하게 됩니다. 식모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어머니를 먹임’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어머니란 무엇일까요? 바로 자연입니다. 자연을 먹인다는 건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도 갖고 있겠군요.

나이 오십이 된 어떤 시인이 산길을 가다가 거미줄을 만났답니다. 거미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거미줄 밑으로 지나갑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올 때 보니 잠자리가 거미줄에 걸려 날개를 떨고 있습니다. ‘잠자리를 살려줘야 하나?’ 하고 거미줄을 한참 바라보다 시인은 거미줄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지나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스무 살쯤 이었다면 길을 막는 거미줄을 걷었으리. 내가 서른 살이나 마흔 살쯤이었다면 거미줄을 걷고 잠자리를 살려줬으리라. 그러나 쉰 살이 된 나는 거미가 밤새 그물을 만든 노력을 생각한다.”

쉰 살을 공자는 ‘천명을 아는 나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명을 안다는 건 곧 ‘자연의 섭리’를 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몸에 체득되었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식모를 귀하게 여김’이 바로 몸에 체득된 자연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은 모든 배움을 뛰어넘는다고 노자는 넌지시 알려줍니다.

앞에서 예로 든 드라마의 ‘입시코디’가 절대로 가르칠 수 없는 그런 배움 말입니다.

<노자 도덕경 20장 : 絶學無憂(절학무우)로다! 唯之與阿(유지여아)는 相去幾何(상거기하)이며 善之與惡(선지여악)은 相去若何(상거약하)리오. 人之所畏(인지소외)를 不可不畏(불가불외)하니 荒兮其未央哉(황혜기미앙재)로다. 衆人熙熙(중인희희)가 如享太牢(여향태뢰)하며 如春登臺(여춘등대)한데 我獨泊兮其未兆(아독박혜기미조)하여 如嬰兒之未孩(여영아지미해)하니 儽儽兮若無所歸(래래혜약무소귀)로다. 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한데 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하니 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런가. 沌沌兮(돈돈혜)로다. 俗人昭昭(속인소소)련만 我獨昏昏(아독혼혼)하고 俗人察察(속인찰찰)이련만 我獨悶悶(아독민민)이로다. 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하고 飂兮若無止(료혜약무지)하자. 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련만 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로다. 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은 而貴食母(이귀식모)로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도 없으리! 공손과 아첨이 얼마나 다르며 선과 악은 거리가 얼마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친 바람 속에 선 듯 줏대가 없구나. 뭇 사람들이 큰 잔치를 벌이거나 봄날에 소풍을 가는 듯 기뻐하는데 나 홀로 머뭇머뭇 뭘 할지 몰라 마치 갓난아이가 웃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고달프고 지쳤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모습이라. 뭇 사람이 모두 여유작작이련만 나 홀로 버려져 어리석은 마음을 가진 듯 바보짓을 한다. 세상 사람들은 밝은데 나 홀로 어둡고 세상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지만 나 홀로 무디다. 담담하기는 바다 같고 드높이 부는 바람처럼 끝을 모르게 고요했으면! 뭇 사람들은 다 쓸모가 있건만 나 홀로 재주 없어 초라하다. 다만 나 홀로 사람들과 다른 게 있다면 ‘식모(食母)’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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