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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9.03.0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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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실마리, 그 황홀함이여!

장주식 작가

장면 하나.

세 사람이 둥글게 앉아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던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A가 대통령이 될 것 같은데.”

그러자 P가 펄쩍 뜁니다.

“뭐? A? 말도 안돼.”

“아니 왜?”

“예전 군대 있을 때 갠 내 졸병이었거든. 그런 놈이 어떻게.”

 

장면 둘.

A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또 세 사람이 둥글게 앉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A의 군대선임 P가 말합니다.

“야. 뭐 이런 선거가 다 있냐? 개나 소나 대통령이 되는 거야?”

“왜 공약이 좋던데. 한 번 믿어 볼만 하구만.”

“글러먹었어.”

“어째서?”

“갠 고졸이거든. 그런 무식한 놈이 뭘 해. 두고 보라고. 헛짓만 해댈 거야.”

 

P는 왜 이렇게 A를 불신할까요? 위 두 장면에서 보면 군대생활 중 A가 졸병이었다는 것과 고졸학력이라는 것이 P의 판단근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P는 A가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더라도 끝끝내 인정해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지독한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아도 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뒤섞이고 흐릿하여 있는 것 같은 데 없고 없는 것 같아 그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도 없다. 분명히 물체로 존재하는데 앞에서는 머리를 볼 수 없고 뒤에서는 꼬리를 볼 수 없다.’

P가 A에게 가진 불신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P가 가진 불신을 알아내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노자는 역시 그 해법을 알려줍니다.

“옛 도를 잡고 지금 현상을 살펴보라. 지금 현상들이 처음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실마리’가 된다.”

황홀하고 뒤섞인 길에서 실마리를 찾아가려면 ‘옛 도를 잡고 지금 현상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옛 도’가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P가 지닌 옛 도는 졸병이나 고졸이 아닙니다. 졸병이나 고졸은 오히려 현상입니다. 졸병이기 때문에 안 된다거나 고졸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 P가 가진 ‘옛 도’가 밖으로 표현 된 것일 뿐이니까요.

아마도 P는 자기 스스로도 모르는 중에 듣고 보고 느껴서 몸에 체화된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선 지역주의나 이데올로기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내가 열심히 공부하여 만든 통찰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것이 마치 내 것인 양 자리 잡은 관념입니다.

또 하나 옛 도에 해당하는 건 ‘괘씸죄’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줄만한데 알아주지 않는 것이 괘씸한 겁니다. 일종의 배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잘났나, 나보다 못한 구석도 많은데, 예전에 나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왜 나를 안 알아줘, 와 같은 마음들입니다. 이 괘씸죄에 걸리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괘씸죄는 미움으로 변하다가 마침내 증오로까지 발전합니다. 증오하는 대상은 그 대상이 무엇을 하든 미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증오하는 대상이 ‘예쁜 짓을 해서 더 밉다.’고 할까요.

결국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괘씸죄 같은 것들은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물론 불행한 관계가 되고 말지요. 이 불행은 대상뿐 아니라 나 자신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맙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입니다.

 

<노자 도덕경 14장 : 視之不見(시지불견)을 名曰夷(명왈이)요 聽之不聞(청지불문)을 名曰希(명왈희)요 搏之不得(박지불득)을 名曰微(명왈미)이니 此三者(차삼자)로도 不可致詰(불가치힐)이라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이라. 其上不曒(기상불교)이요 其下不昧(기하불매)하여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이니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이라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이요 無物之象(무물지상)이니 是謂惚恍(시위홀황)이라.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요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하니 執古之道(집고지도)로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하여 能知古始(능지고시)하니 是謂道紀(시위도기)라.

보아도 보이지 않음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음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얻지 못함을 미(微)라 하니 이 셋으로도 따져서 밝힐 수 없으므로 뒤섞인 하나라 한다. 위라서 밝지 않고 아래라 어둡지 않아 이어지고 이어져 이름붙일 수도 없어 물건 없는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모양 없는 모양이요 물건 없는 형상이니 이를 ‘황홀’이라 한다. 앞에서 맞이 해도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 따라가도 꼬리를 볼 수 없으니 옛 도를 잡고 지금 현상을 살피면 처음 비롯됨을 알 수 있으니 이를 일러 ‘도의 벼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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