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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신문TV인터뷰] 김학민 경기문화재단 신임 이사장

[여주신문TV인터뷰] 김학민 경기문화재단 신임 이사장

  • 기자명 박관우 기자
  • 입력 2018.12.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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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동면 도리를 인문적인 사랑방 거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부친이 여주에서 도자기 공장 운영, 어머니는 여주생활 그리워해 경기문화재단 양적팽창에 맞는 질적 변화가 됐는가 고민해야

박관우: 안녕하세요?도리에는 언제 이사를 오시게 되었나요?
김학민: 여주와의 인연은 10년 이상 되었는데 작년 가을부터 집 짓고 온 것은 올 봄에 왔습니다. 도리에 온 것은 도리가 한자로 길 도(道) 자에요. “길이 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 여주가 갖는‘평화로운 풍경’이런 것이 꽂혔어요.‘도시적 삶을 청산하고 살 데가 여기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10년 전에 선택을 하고 금년에 오게 된 거죠..
박관우: 잘 오셨습니다.
김학민: 나도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관우: 도리는 한적하고 강도 있고 또 홍일선 시인님도 계시고 장주식 작가님도 계셔서 저희가 좋아하는 동네입니다. 더구나 이사장님 이사 오셨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입니다. 특히 여주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여주에 사시는 분이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하니 흐뭇하고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학민: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어디가 살면 그 지역 사람 아니겠어요? 저도 앞으로는 여주사람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갖고 이 지역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역할을 하고 여주에서 내 노년을 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그리고 홍일선 시인은 사실은 제 사촌동생입니다.
박관우: 정말 입니까?
김학민: 그럼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도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홍일선 시인 때문인데 제가 10년 전에 교육부에서 기관장을 했을 때 서울의 기관과 농촌과 자매결연을 맺는 1사1촌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홍일선시인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하고 자매결연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또 도리와 자매결연 하면서 제가 깊은 관련을 맺게 되고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땅을 사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투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데.......
박관우: 여기가 투기할 그런 곳은 아닌데요.
김학민: 여기 와보니까 동네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3중,4중,5중으로 규제가 많더라고요.
박관우: 규제가 많습니다.
김학민: 그래서 여기가 우리가 살 동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분들은 땅값도 올랐으면 하는 분위기인데 우리는 도시에서 와서 이런 규제 속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환경도 보존되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까 서로 간에 조심했습니다.
박관우: 도리 같은 경우, 예술과 문학 활동하는 분들이 조금 더 많이 오셔서 특화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김학민: 네. 지방자치단체들이 각기 자기도시에 대한 캐치프레이즈를 걸잖아요. 여기는 인문도시를 걸었더라고요. 다른 지자체는 역사와 문화와 충절 이런 것을 많이 거는데 저는 인문도시를 걸었다는 것 자체가 누가 했건 간에 잘 걸었다고 생각하고....... 여주가 갖는 역사성과 세종대왕이 계시고 해서 그런 쪽으로 이벤트들도 만들고, 시의 인프라들도 형성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죠. 저도 인문도시에 내가 무엇을 기여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도리에 들어오면서 보시다시피 사회과학 서적이 3000여 권이 있는데. 지금으로 보면 그 책이 뭐에 필요하겠냐 하겠지만 전 세대에 고전적이고 시대변혁에 한 역할을 했던, 모멘텀을 제공하던 서적들인데 그런 게 현재적 의미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이런걸 모아놓은 의미도 있고 도리를 그런 인문적인 작은 도서관이랄까. 도서관이라는 타이틀은 공식적이기 때문에 사랑방 이런 것.......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MT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책도 보고하는, 몇 개 거점을 만들었으면 하는 게 도리에 들어오면서 제 생각이었어요.
박관우: 책이야기가 나왔으니 학민출판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어릴 적 학민출판사에서 나온 도서를 즐겨 읽는 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장님 만나기전 어떤 도서들을 읽었나 찾아봤더니 노래책도 좀 있고 ‘민족과 굿’ 같은 저희 세대에게는 고전과 같은 책들이더군요. 저희 집에도 이제는 낡아서 툭 치면 먼지가 날리는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책들이 있어서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도리가 문학과 관련된 마을이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고 저도 많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 학민사와 관련해 추억이 있지 않을까요?
김학민: 학민사는 제 이름을 따서 출판사를 만들어 경영을 했는데 그전에 한길사에서 편집장으로서 5년을 근무했어요 . 70년대 후반인데 그때는 인문학 전문서적이나 사회과학 전문서적을 상업 출판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교수나 그런 사람들이 자비출판을 하거나 했는데 제가 한길사의 편집장을 하면서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상업 출판했어요. 그 당시가 유신시대, 박정희 정권의 말기죠. 70년대 후반이니까. 그 당시 보수언론에서는 의식화작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제가 지금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식화 작업을 한 겁니다. 대학이 전부 초토화되고 학문이 억압당할 때 우리가 밖에서 출판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읽고 학생들이, 대중들이 깨어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당시 출판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각오라든지 출판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라던 것이 다 그렇습니다. 거기 연장선에서 제가 학민사를 창업했고 그 다음에 500여 권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을 했는데 그분들이 간혹 지금 50대, 60대에서 제 책과 저의 의도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감사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편집국장님이 그러시네요.
박관우: 제 기억에 학교 앞마다 전문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용돈이 5만원이 오면 2만원은 책을 샀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화재를 바꿔서 경기문화재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경기문화재단 초창기 멤버시더라고요. 처음에 경기문화재단이 생겼을 때 경기도 예술인들에게 ‘이런 곳이 있었어? 문화예술인을 지원한다고?’라며 축복이라고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초창기 재단 활동은 어떠셨어요?
김학민: 출판운동을 하면서 70년대 80년대에 문화운동을 할 때 처음에는 순수문화예술운동을 문화라고 했는데 생활문화운동을 합하고 종교문화, 여러 가지 문화로 이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확산됐습니다. 제가 가담하게 된 것은 출판문화운동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맞는다고 봤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 책을 통해서 대중화 시키고 대중의 필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게 하는 출판운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던 거죠. 그러다보니까. 출판운동 이외의 순수 고전적으로 했던 문화예술운동 문학이라든지 미술, 연행예술 이런 것으로 이해가 넓혀 가다보니까. 제 자신이 그쪽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 대한 이해가 많았어요. 그래서 문화재단이 생겼을 때‘내가 여기서 일 하면은 한 분야에 깊이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반에 대한 이해는 좋겠다’,‘할 수 있겠다’하고 들어갔는데 그 당시 경기문화재단은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재단이예요. 그러니까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는 거죠. 우리가 가는 길이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도 많이 하고 나가서 배우기도 했습니다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첫 돌을 놓고 길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지금 경기문화재단에 관해서는 여주와 관련된 두 분이 있어요. 경기도 문화관광국에 속한 공무원이셨는데 많은 역할을 했어요. 한 분은 군수까지 지내신 문화관광국의 이기수 문화정책과장이셨고 한 분은 차재윤씨라고 있었어요.

박관우: 도의원 하신 분이죠.
김학민: 그 분이 계장으로 계셨어요. 그분 두 분이 초기 경기문화재단 만들 때 실질적으로 설계를 하신 분 들이예요. 저는 그 분들이 공무원으로서 여러 가지 헌신을 하고 물론 한계도 있었지만 아주 잘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관우: 어떻게 보면 친정에 다시 들어가시는 거잖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김학민: 제가 20년 단위로 문화운동에 변곡점에 있었어요. 20여 년 동안 재야에서 문화운동을 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실천을 못하는 도상연습 같은 거예요. 맨날 담론만 가지고 얘기하고 그러는 건데, 그 담론을 가지고 98년에 경기문화재단에 들어가서 실천을 해봤어요. 그러니까 맞더라고요. 가장 컸던 것이 민중, 도민의 문화예술향수기회를 도민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한다 이거죠. 그 틀을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니까 잘 풀려가는 거지요. 한 3년 동안 문화재단 방향에 대해 이렇게 가야한다는 것을 제가 고집스럽게 싸워가면서 관과 정치권에 외풍을 가차 없이 막았어요. 그것이 현재 문화재단의 공모지원사업에 그대로 연결돼서 잘되고 있는 것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올바른 길이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화재단 근무한지 20년이 지났어요. 그리고 이번에 들어가는데 20년 나와 있는 동안에 밖에서 보니까 그 사이에 문화재단은 양적팽창을 했어요. 예산도 근 천억이 되고 지금은 직원이 540명이예요. 밖에서 보니까 객관화된 시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양적팽창 속에서 질적 심화가 됐는가는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제가 취임식에서 단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인정하지만 양적팽창에 맞는 질적 변화가 됐는가라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이 고민하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박관우: 여주시민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김학민: 여주시민 여러분! 여주에 온지 1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면 어디를 가든지 자기 땅이고 자기 고향이고 하듯이 저는 여주를 낯설게 보지 않습니다. 저는 고향이 용인이고요. 어렸을 때 신륵사 수학여행도 몇 번 오고 더구나 저희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에 여주에서 도자기 공장을 운영해서 다 고인이 되셨지만 저희 어머님은 어렸을 적 여주에서의 생활을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참 여주는 저희 집안과 저와는 가까운 곳입니다. 그리고 결국 태어난 곳은 한 곳이지만 태어난 것은 한 시점이죠. 그러나 뼈를 묻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리면서 있습니다. 제가 문화예술 콘텐츠를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들어내고 있을 때 ‘태어난 곳보다는 무덤이 있는 곳을 선점하라’, 세종대왕도 태어난 곳은 서울 아닙니까? 그러나 무덤이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은 천년, 2천년, 3천년 우리나라가 없어지지 않으면 여주에 있죠. 문화콘텐츠로서 또는 존경하는 위인으로서 세종대왕을 여주가 선점하여 앞으로 계속 나가듯이 저도 여주에서 죽을 때 까지 살 테니까 잘 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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