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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4. 길은 늘 텅 비어 있다
장주식/ 작가

동화 <강아지 똥>을 쓴 권정생선생이 일흔 둘에 귀천했을 때입니다. 안동 조탑리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국에서 버스로 기차로 승용차로 남녀노소 수백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조탑리 주민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응? 권영감이 이렇게 유명했어?”
그 말을 들은 어떤 작가가 말했죠.
“모르셨어요? 선생님이 쓰신 작품이 텔레비전 주말연속극으로 방송되기도 했는데요.”
“허 참. 그냥 뭐 좋은 양반이었어. 마을회관에 가끔 오면 말도 없이 가만히 웃고 있었다니까. 뭘 주면 맛있게 먹곤 했지. 그게 다여.”
이 일화를 듣고 나는 노자가 말하는 ‘빛을 흐리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빛은 내가 잘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고 티끌은 세상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잘난 체를 하면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내 빛이 너무 세면 주변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마주 볼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없는 빛도 과장하려는 게 사람 본능이라 자연스레 쏟아지는 빛을 흐리게 하기는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빛을 흐리게 한다는 건 빛을 부드럽게 하여 누구나 편안하게 느끼도록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제안 하고 싶은 건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아는 걸 가르치고 싶어 합니다. 배우려는 욕구도 물론 있지만 약간 다릅니다. 배우려는 욕구는 자기가 원하는 건만 배우고 싶은 선택적 욕구입니다. 반면 가르치려는 욕구는 무차별입니다. 왜 내가 잘 아는 걸 사람들이 배우려고 안 하지? 하는 거죠. 선택적으로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이것도 배워!’ 하고 가르치려 들면 어떻게 될까요? 결과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이 될 겁니다. 내가 잘하는 건 나의 날카로움이란 말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지혜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날카로움을 가르치려 들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 난장판이 되겠지요. 얽히고 뒤섞인 분분(紛紛)한 세상이 평화로워지려면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날카로움을 좀 무디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건 가르치려는 자세보다 ‘무엇이든 배워 보겠다.’는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권정생 선생은 2007년에 돌아가셨지만 2005년 5월 1일에 유언장을 써두었습니다. 수백 명이 모인 영결식에서 한 시인이 유언을 낭독할 때 사람들은 엉엉 울다 쿡쿡 웃다 했어요. 짧은 유언 속에 할 말을 다 하면서도 해학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한 대목을 인용해 볼게요.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낭만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정겹고 진솔합니다. 에헴, 무게를 잡고 번거로운 격식으로 저 멀리 있는 그런 유언이 아니죠. 연간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다 돌려주라고도 써두었습니다. 개처럼 헐떡거리다가 죽을 거라는 표현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이고 입을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 같이 죽을 거라는 말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와 같습니다.
길은 텅 비어 있어 누구나 다닐 수 있지요. 수많은 사람이 빼곡하게 걸어갈 때는 가득 찬 듯 보이지만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면 또 텅 빕니다. 그래서 차지 않고 늘 비어 있는 것이 길이지요. 권정생은 그런 길이었습니다. 힘들고 아픈 사람 누구나 가서 걸을 수 있는 길이었고,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 찾는 길이었고, 아이들이 언제든 가서 뛰어놀 수 있는 길이었어요. 하느님 안에도 있고 하느님 밖에도 있고 하느님과 나란히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길은 텅 비어 있어 쓰고 써도 언제나 가득 차지 않는다. 길은 깊고 깊어 만물이 생겨나는 뿌리와 같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얽힌 걸 풀고 빛을 흐리게 하여 먼지와 하나가 된다. 맑고 고요하기가 한결같아 누구 아들인지 나는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으리라.

<도덕경 4장 : 道沖(도충)하니 而用之或不盈(이용지혹불영)하며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이라. 挫其銳(좌기예)하여 解其紛(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여 同其塵(동기진)이라. 湛兮似或存(담혜사혹존)하니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이나 象帝之先(상제지선)이라. >

여주신문  yeoju@yeoju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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