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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2. 절대미가 있을까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2. 절대미가 있을까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8.11.1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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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자 장자는 책 <장자>에 이런 대화를 남겼습니다. 스승 왕예와 제자 설결이 나누는 대화랍니다. 설결이 먼저 묻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세상 만물이 다 똑 같이 옳다는 걸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스승님은 스승님이 아는 게 없다는 걸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나?”
“그럼 스승님은 아는 게 없습니까?”
“내가 어찌 알겠나만 한 번 말은 해보도록 하지. 모장과 여희가 절세미인이라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그렇죠.”
“그런데 말일세. 모장과 여희를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두 여자를 보고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갔으며 사슴은 재빨리 도망 가버렸네. 사람, 물고기, 기러기, 사슴 중에 누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봤다고 하겠나?”

모장과 여희는 전설적인 미녀입니다. 하지만 모장과 여희를 아름답다고 하는 세상은 ‘사람들 세상’에 국한된 것이죠. 물고기, 기러기, 사슴은 모장과 여희를 보고 도망을 칩니다. 모장과 여희가 무섭거나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름다움과 추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있고 없음, 쉬움과 어려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듣는 소리와 내는 소리, 앞과 뒤가 다 그렇습니다. 어떤 건 길어서 좋지만 어떤 건 짧아야 좋습니다. 세상 모두가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얘깁니다.

남인도 타밀남두에는 ‘인도 오르빌’이라는 인류공동체 마을이 있습니다. 인종, 성별,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모여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며 설립된 곳이죠. 오르빌은 자급자족, 행복한 노동, 화폐 없는 경제, 이상적인 교육, 직접민주주의와 만장일치를 목표로 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 되는 도시’라는 지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억압자는 무엇일까요? 보통 부모, 관습, 사회문화 등이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부모가 가장 강력한 억압으로 등장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안 할 수 없으니까요.
여기서 부모들은 ‘낳고는 가지지 않는’다는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식을 통해서 부모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식의 두 어깨에 부모가 걸터앉아 짓누르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자식은 나를 통해서 세상에 왔을 뿐이며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가면 된다고 대범할 수는 없는 걸까요? 성인은 그렇게 한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만물이 세상에 나서 자기가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을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도 없다는 거죠.

‘돈은 주지만 간섭은 않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우스개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다 해놓고도 으스대지 않고 공을 세우고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하는 성인의 모습이 바로 그러니까요. 부모가 성인처럼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 자식들은 나중에 부모에게 효도를 할 겁니다. ‘공을 세우고도 머물지 않으므로 결국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공부하면 모두 천재가 된다.”

나를 위한 공부란 내가 좋아하며 내가 잘하는 그런 공부를 말합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인데 천재가 되지 말래도 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수많은 억압자들이 천재가 되는 길을 막아섭니다. 억압자들에 순응하는 길은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억압을 당하면 생이 불행할 뿐 아니라 언젠가는 아주 나쁜 방향으로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돈이나 권력, 미모나 지위 같은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절대미가 될 수 있을까요? 절대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추하고 아주 불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살기 힘들다는 말이 많은데 아마도 악하고 불선한 것들이 절대미 행세를 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모두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추한 것일 수 있다. 세상이 모두 착하다고 하지만 그건 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이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이 서로 견주고 높고 낮음이 서로 기울어지고 내는 소리와 듣는 소리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그리하여 성인은 ‘무위’로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만물이 생겨나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고 낳고는 가지지 않으며 다 하고도 으스대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에 결국 없어지지도 않는다.

<도덕경 2장 :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이나 斯惡已(사악이)요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이나 斯不善已(사불선이)라.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하고 難易相成(난이상성)하고 長短相較(장단상교)하며 高下相傾(고하상경)하며 音聲相和(음성상화)하고 前後相隨(전후상수)라.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하며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하며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하고 生而不有(생이불유)하고 爲而不恃(위이불시)하며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니라. 夫唯弗居(부유불거)하니 是以不去(시이불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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