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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8.11.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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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윽한 하나

장주식 작가


탐욕과 무욕이 하나라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요? 다르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안 됩니다. 밖으로 드러났을 땐 차이가 나지만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시골 작은 마을에 사는 오십대 남자 얘기입니다. 칠팔십 대가 대부분인 마을에서 오십대 젊은이는 사랑을 많이 받는 위치에요. 이 남자는 노인 분들이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일을 성심껏 도와드리는데요, 때론 귀찮은 느낌도 있지만 열심히 한다고 해요. 그런데 가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정말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도와드리는 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평판을 얻기 위한 욕심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거죠.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보면 누구나 달려가서 구한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는 그 어떤 계산도 없이 말이죠. 아기를 구하지 않았다는 욕을 먹기 싫어서라거나 아기 부모에게 보상을 받을 거라는 계산 같은 건 없다는 겁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한 어떤 사람 얘기도 같은 경우입니다. 역으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는 절체절명 순간,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한 사람이 뛰어들어 취객을 선로 중앙 틈으로 안고 피합니다. 한 생명을 구해 낸 이 영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저 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밖에는.”

우물로 기어가는 아기를 구한 사람이나 지하철 영웅은 무욕 상태에서 몸을 움직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은 욕망이지만 가끔 이런 무욕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뭔가 ‘오묘함’을 볼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오묘함이란 ‘신화’입니다. 지하철 영웅이 한 일을 우리는 ‘신화’라고 부를 수 있죠. 지하철 영웅은 원래 평범함 인간이지만 사람을 구해 낸 그 순간 행동은 ‘신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지하철 영웅은 뭔가 오묘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건 무엇일까요?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정말 무욕으로 행동했을 때 느끼는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때가 우리도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이 두 가지는 다 하나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욕망이 바탕이 되었던 무욕이 바탕이든 ‘그윽한 하나’라는 거죠. 욕망과 무욕이 뒤섞여 있는 그윽한 바다. 드넓고 깊고 아득하여 검고 또 검은 색. 우리들 무의식 세계라고 해도 될까요? 이곳에서 모든 오묘함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욕망을 바탕으로 나오면 훔치기도 하고 구하기도 하고 뭔가 마구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무욕을 바탕으로 나오면 ‘이름 지을 수 없는 오묘함’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쉽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습니다. 말을 하는 순간 본질을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구별할 수 없고 구별하지 않으면 질서가 없습니다. 결국 이름은 필요악인 셈인데, 인간사회는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사회질서가 달라집니다.
가능하다면 ‘무욕 상태’에 가까운 선택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지하철 영웅처럼 무욕 상태에서 한 행동은 모두 좋은 일, 신화적인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욕이란 탐욕이 없음, 이기심 없음 등과 동의어이기 때문이죠. ‘시골 오십대 남자’는 거의 모든 행동을 ‘욕망 상태’에서 선택한다고 고백했지만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택한 행동들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죠.

욕망상태에서 선택을 하더라도 선한 일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자주 행동하다보면 가끔 무욕상태에서 행동을 할 가능성은 늘 열려 있으니까요.

도를 도라 하면 진짜 도가 아니다. 이름 지어 부르면 그 이름은 진짜가 아니다. 세상의 시작은 무명이지만 만물의 어머니는 유명이다. 때문에 욕심 없으면 오묘함을 볼 수 있고 욕심내면 흔들림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지만 나타남에 이름이 다를 뿐이다. 하나로 말한다면 그윽하다 할 수 있고 그윽하고 또 그윽하여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 된다. <도덕경 1장 :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요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라.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요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이니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하고 常有欲以觀其� (상유욕이관기요)하니 此兩者同(차양자동)이라. 出而異名(출이이명)이나 同謂之玄(동위지현)하니 玄之又玄(현지우현)하여 衆妙之門(중묘지문)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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