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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이포 만세운동 이갑수 선생 옛집을 가다당시 흥곡면사무소 40m 옆의 집터는 현재 채소밭으로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열렸던 ‘이포 만세운동’ 주역의 한 사람으로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 순국한 이갑수(李甲洙, 1879.10.01.~1919.05.22.) 선생의 활동에 대해 지역사회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여주신문>은 선생이 살던 집터를 찾았다.

이갑수 선생의 증손인 흥천면주민자치위원회 이재각(57) 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처음 방문한 곳은 일제에 체포돼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돌아온 길이다.

선생이 떳목에 실려 도착한 곳은 현재 여주시 흥천면 계신리 부처울로 불리는 마을의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안쪽 개울가다.

이재갑 위원장은 “제가 어릴 때 이곳 안까지 물이 가득차 있었으며, 당시에는 강과 현재의 복하천의 물이 넘쳤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부처울 마을 강가에서 들것을 이용해 선생이 이동한 길은 현재 지방도 333호선이 지나는 계신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길을 따라 마을 앞길을 따라 가다 갈여울고개를 넘어 복대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지금은 10여m정도 낮아졌지만 당시에는 서낭당이 있는 길이었다는 이길은 지금도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다. 이재갑 위원장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선생의 옛집이 있던 자리는 현재 채소를 키우는 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길가에 위치한 선생 집터의 현재 주소는 여주시 흥천면 복대리 271-10번지다.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선생의 집터에서 직선으로 보이는 40여m 앞의 여주시 흥천면 복대리 406번지는 구한말 흥곡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요즘 말로 하면 면소재지 마을이니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하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갑수 선생이 인근 마을 사람들과 만세를 의논하기 전에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에 참가하였다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귀가하였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리적 여건과 이갑수 선생이 양잠(養蠶)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면 고종황제 인산에 참여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 올 정도로 나라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자산가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기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일 민족투쟁의 길에 앞장 선 애국선열들의 자료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느껴는 것이지만, 애국지사의 생가나 집터 등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들에 마을 입구마다 세우는 그 흔한 표지석 하나 제대로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회든지 현재의 달콤함에 취해 과거를 잊는다면 미래는 발전이 아닌 퇴보가 될 것 이기 때문에, 여주에서 나거나 살며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애국선열 선양사업에 지역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장호 기자  yeojupe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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