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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이포 만세운동 주역 이갑수 선생을 찾다

여주 이포 만세운동 주역 이갑수 선생을 찾다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18.10.22 13:06
  • 수정 2022.04.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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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 이재각 씨 “항일 민족투쟁 선열들에 대한 관심 가지길”

이갑수(李甲洙, 1879.10.01.~1919.05.22.) 선생의 훈장증을 증손인 이재각 위원장이 보여주고 있다
이갑수(李甲洙, 1879.10.01.~1919.05.22.) 선생의 훈장증을 증손인 이재각 위원장이 보여주고 있다

 

<본지단독>해거름이 여주 남한강변 복대마을 강가에 드리울 때 작은 뗏목 하나가 강변에 도착했다. 뗏목에는 온몸이 모진 매질로 크게 망가진 한 남자가 생사를 넘나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처참한 모습에 아내와 아홉 살 어린 아들은 통곡을 했고, 강가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도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망가져 순국한 이갑수(李甲洙, 1879.10.01.~1919.05.22.) 선생의 귀가 풍경이다. 

이 이야기는 기자가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한 것으로 정부는 이갑수 선생은 순국 95년이 지난 2014년 8월 15일 3.1운동 순국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갑수 선생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여주시 흥천면 일대에 여러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갑수 선생의 이야기를 제보한 사람은 “이갑수 선생이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했으나, 오랫동안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재 흥천면 복대리에 살고 있는 이갑수(李甲洙) 선생의 증손인 흥천면주민자치위원회 이재각(57) 위원장은 증조부에 대해 “인물이 헌칠한 헌헌장부로 당시에 양잠(養蠶)을 크게 해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돌아가신 후 집안이 풍비박산으로 묘 자리도 없어 외갓집 선산에 모셨다”며 “당시 할아버지(이갑수 선생의 아들)는 아홉 살 어린나이였다”고 한다. 

이갑수(李甲洙) 선생 공적조서
이갑수(李甲洙) 선생 공적조서

이갑수 선생의 애국 활동이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갑수 선생에게 추서된 훈장은 2014년 광복절에 당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유족이 직접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갑수 선생의 활동은 주일한국대사관이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문서에 기록된 것이 확인됨으로서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갑수 선생의 유족이 2014년 7월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공적조서에는 <1919년 4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피살, 순국함>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유족들도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전해들은 이야기와 국가보훈처에서 보내온 공적조서의 내용만 알고 있었다. 

이재각 위원장은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아버님도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생전에 못이뤄 비통했지만, 이제라도 증조부님의 애국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게 돼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적조서의 내용이 너무 간략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찾아보니 이갑수 선생에 대해 <1919년 4월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흥천면(興川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에 참가하였다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귀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흥천면 복대리(卜大里)와 인근에 거주하는 이방헌(李邦憲)ㆍ심원창(沈遠昌)ㆍ이우신(李祐信)ㆍ성완식(成完植)ㆍ이태용(李泰用)ㆍ조병우(趙炳祐)ㆍ박제한(朴濟漢) 등과 논의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를 면민들에게 알리고 규합하여, 흥천면에 인접한 금사면(金沙面) 일원에서 대대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포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여주분견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사경에 이르러 보석으로 귀가 조치됐으나, 장독(杖毒)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고 적고 있다. 

공훈록의 내용을 보니 여주 <이포 만세운동>이 떠올라 이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니, <이포 만세운동>은 이포리를 비롯해 인근 지역에서 모인  3000여 명이 이포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군중은 해산했으며, 만세시위를 이끌던 지도자 10명이 체포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체포된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질 않는다.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이포 만세운동>의 기록과 흥천면 복대리에서 금사면 이포리까지는 3Km 남짓해 도보로 30여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이갑수 선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논의한 사람들은 이 일대의 마을들에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현재로서는 이갑수 선생이 <이포 만세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시의 역사를 정리한 <여주시사>는 이갑수 선생에 대해 <여주 출신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한말 이래 계속되어온 민족교육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화되었다. 서간도지방에서도 신민회의 신흥강습소에서 유래한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졌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을 전후하여 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형제와 이상룡·이동녕·김동삼·주진수·윤기섭·김창호 등이 가족을 거느리고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여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그 뒤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로 옮겨 1913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는 김동삼·윤기섭·김달·이규동·김순칠·이광·이천민·이청천·성준용·원병상·이범석·박장섭·김성로·계룡보 등과 함께 교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됐으며,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1976년)에 따르면 <1927년 1월 15일 신간회 준비회와 합동 발기회를 구성을 하며 중앙본부를 관수동(觀水洞)의 이갑수(李甲洙) 집으로 정하였다>한다. 

이런 기록들로 볼 때 여주시사에의 이갑수 선생에 대한 기록은 1919년에 순국한 여주 흥천면 이갑수 선생으로 보기 어렵다고 추정된다. 

이갑수 선생의 묘소, 현재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 모셨다(이재각 위원장 제공)국난의 시기에 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항일민족투쟁에 나섰다. 어떤 선열들은 기록이라도 남아 그 활동을 엿볼 수 있지만, 기록이 없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애국선열들의 희생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매운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재각 위원장은 “우리 증조부님은 다행히 기록이 발견돼 애국 활동을 인정받았지만 만세운동과 의병활동에 나섰다가 희생된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다”며, “지역사회가 국난의 시기 항일 민족투쟁에 앞장선 애국선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당시 이갑수 선생과 함께 피체된 이방헌ㆍ심원창ㆍ이우신ㆍ성완식ㆍ이태용ㆍ조병우ㆍ박제한 선생 등은 기록이 없어 국가보훈처 공훈사료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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