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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배우는 인문학-긴 놈, 질긴 놈, 진 놈

한국말로 배우는 인문학-긴 놈, 질긴 놈, 진 놈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8.09.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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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새힘 작가

‘지’는 길게 늘어지거나 펼쳐지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나 선뜻 떠오르는 말이 없다. 예를 들어“나는 그를 만난‘지’ 10년이 되었다.”라고 하면 ‘지’가 좀 이해가 될까? 아직 확실치 않고 억지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을 들으면 확실하게 이해가 될 듯하다.

시간을 오래 끌면 우리는 흥미를 잃고 ‘지겹다’라고 말한다.‘겹다’는 참기 힘든 상태, 포개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데‘눈물겹다’,‘역겹다’‘정겹다’, ‘흥겹다’,‘힘겹다’와 같이 사용한다. 오늘날은‘지루하다’로 쓰기도 한다.

‘지’는‘지이’가 아니고‘지기’이다.‘지기’는‘두 팔과 두 다리’를 뜻하는 말로 역시나 길게 늘이거나 펼치는 것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팔이나 다리와 같은 것을 쭉 뻗는 것을‘지르다’라고 한다. 또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넓이의 땅을‘마지기’라고 하고 씨름에서 배를 피는 힘으로 상대방을 들어 넘기는 기술은‘배지기’이다.‘지기’와 비슷한 말에는‘지개’가 있다.‘기지개’는 팔다리와 몸을 쑥 펴는 행동을 말하고‘무지개’는 물이 하늘에 펼쳐서 햇빛을 굴절시키는 현상이다. 마찬가지로‘도지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물건으로 무소뿔로 만든 활을 펴서 시위를 걸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달걀이나 반죽을 넓게 펴서 부치는‘지단’, ‘지짐개’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는 중세시대에는‘디’였다. 해, 달, 꽃, 불, 목숨, 이슬 따위는 (시간을 끌면서 어느 정도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지게 된다. 그래서 10년 동안 사귀어 온 사람을‘십년지기’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은‘지켜보다’인데 문, 땅, 산을‘지키는 사람’을 각각 문지기, 땅지기, 산지기라 한다. 잘 지키는 것을‘지긋하다’라고 하는데 이를 반복해서‘지긋지긋하다’라고 하면‘지겹다’보다 훨씬 센 말이 된다. 시간이나 정도가 벗어나면‘지나다’라고 한다.

‘지’는‘질’로 뻗어 나왔다.‘질’은 그릇을 만드는 진흙을 말하고 질기와, 질그릇, 질항아리 같은 말의 앞에 붙는다. 또 제주도에서‘질’은‘기지개’를 가리킨다.‘질질’이‘끌다’,‘흐르다’, ‘흘리다’와 같은 말과 쓰이는 것을 보면‘질’은 길게 늘어나거나 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끊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밥, 반죽, 땅에 물이 많으면‘질’게 되는데 점도가 높아져서 잘 떨어지지 않게 된다. 함경남도에서는‘질다’를 손을 뻗어 물을 푸는 작업을 나타내는‘긷다’의 뜻으로도 쓴다. 사투리에서‘질다’는‘길다’의 뜻도 있다.

잘 끊어지지 않고 오래 견디는 성질이 있는 것은 ‘질기다’라고 하고 똥이나 오줌을 참지 못하고 조금씩 싸는 것을 ‘지리다’라고 한다.‘지리다’는‘질’에‘-히다’가 합쳐진 것이다.‘지긋지긋’한 것을 넘어서면 완전히‘질리고’ 만다. 

이제‘질’을 알았으니‘지렁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질+엉+이’는 습기가 많은 진 곳에 살면서 몸을 길게 늘이는 방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지렁이는 이렇게 두 가지의 뜻으로 아주 잘 설명이 된다.

‘지’와‘질’이 펼치는 것을 뜻하면 대조적으로‘진’은 달라붙은 것으로 대표적 동물로는‘진드기’와‘진디’가 있다. 이들은 달라붙어 속에 있는 액체를 빨아먹는다. 또 물이 많아서 발에 달라붙는 땅은‘진창’이나‘진탕’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질다’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마디마디가 붙은 몸을 가진‘지네’는‘지느러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는데‘진’과‘늘어지다’가 결합한 말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추울 때나 무서울 때‘진저리’를 치거나 내는데 원래 이 말은 달라붙은 것을 떼려고 몸을 떠는 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절’은 제주에서는‘물결이나 파도’를 뜻하는 말이니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른 것과 비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진배없다’는‘진’과‘바’의 결합으로 보면‘더 붙일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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